우리가 진정 바라는 행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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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바라는 행복이란?
  • 송유레 경희대학교·철학
  • 승인 2022.02.0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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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에우데모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송유레 옮김, 아카넷, 376쪽, 2021. 11)

 

최근 덕윤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뜨고 있다. 덕윤리(virtue ethics)는 근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 온 의무윤리(duty ethics)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이론으로 부상했다. 칸트와 벤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의무윤리가 의무, 즉 올바른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덕윤리는 덕, 즉 훌륭한 사람됨을 강조한다. 서양의 윤리학자들은 덕윤리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 윤리학 전통,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찾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서양 고대의 행복주의(eudaimonism) 전통 속에 자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윤리학적 탐구를 하는 목적은 단순히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열쇠가 바로 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덕을 실현하며 사는 훌륭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행복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얻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사람됨의 훌륭함, 즉 덕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덕을 인간 영혼의 양면적 본성을 근거로 규정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이성적인 영혼의 훌륭함을 지성적 덕, 비이성적 영혼의 훌륭함을 성격적 덕으로 지칭했다. 그는 욕망과 감정에 관련된 비이성적인 영혼이 이성에 순종하거나 반항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며, 비이성적 영혼의 욕망과 감정을 이성에 맞추어 조율하는 성격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무작정 믿으라고 강요하는 대신, 체계적인 논의를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동의를 이끌어 내고자 시도한다. 그는 사람들이 제각기 마음속에 진리에 이바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이 참되지만 불명료하게 표현한 것을 명료화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보았다. 그는 행복에 대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뒤죽박죽으로 말하는 대신 근거를 가지고서 체계적이고 질서 정연하게 말함으로써 대화 참여자들이 공동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확립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한다. 

‘행복’(幸福)으로 옮긴 그리스어 ‘eudaimonia’는 그가 활동한 고대 그리스 고전기에는 ‘잘 사는 것’(eu zên)’ 또는 ‘잘 지내는 것’(eu prattein)과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다. 그는 바로 이러한 통상적인 의미에서 출발하여 행복을 개념화한다. 따라서 그의 행복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관적인 만족감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그는 행복한 삶이 가장 만족스럽고 즐거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행복은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 다시 말해 인간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을 이루면 만족하고 즐거워한다. 하지만 행복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지, 우리가 바라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지 않은 것도 바란다. 따라서 행복이라고 여긴 것이 실제로는 행복이 아닐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행복이 공론장에서 검토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상한 행복의 윤리학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와 『에우데모스 윤리학』에 담겨 전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기원후 2세기 아마도 최초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인 아스파시오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해 주석서를 쓴 이래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저술의 ‘결정판’으로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다수의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하지만 후대의 평가가 항상 공정한 것은 아니다. 고대 문헌의 전승에는 종종 우여곡절이 숨어 있다. 가령, 기원전 1세기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편집하며 남긴 저술 목록에는 『에우데모스 윤리학』는 있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없다. 비슷한 시기 키케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의 저술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런가하면 위에서 언급한 아스파시오스는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에우데모스의 저술이라고 보았다. 19세기 독일 문헌학자인 슐라이어마허는 두 작품 모두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에 이르러, 두 작품 모두 진작이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두 작품의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두 작품이 각기 니코마코스와 에우데모스에 의해 편집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헌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후반 영미학계를 중심으로 『에우데모스 윤리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동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편중된 연구도 균형을 잡아 가고 있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의 우리말 번역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일조하길 소망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조각상
               아리스토텔레스 조각상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총 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4권부터 6권까지 세 권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5권에서 7권과 겹친다. 이러한 구성상의 특수성은 두 작품 간의 관계에 관해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두 작품에서 겹치는 책들은 원래 어느 쪽에 속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윤리학 저서를 두 편이나 썼을까? 어느 작품을 먼저 썼을까? 두 작품은 서로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이런 질문들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두 작품 모두 행복을 주제로 하지만, 행복에 관한 입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사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제시된 행복관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논란이 있다. 크게 두 가지 해석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하나는 인간 행복이 오로지 최상의 덕의 실현, 즉 지성적 삶의 구현에 있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 지성적 덕의 실현 외에 성격적 덕의 실현을 비롯해 부와 명예, 좋은 집안, 건강 등 이른바 외적 좋음들을 포괄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이 책의 마지막 제10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불변의 진리 탐구에 헌신하는 관조적 삶을 최선의 행복으로, 성격적 덕과 실천적 지혜를 통해 실현되는 정치적 삶을 차선의 행복으로 제시한다. 그는 관조적 삶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삶의 극치, 신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신적 경지에 이른 행복한 현자의 인간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는다. 다만, 지복의 현자도 인간인 한에서는 인간노릇을 해야 한다는 정도로 논의를 갈무리한다. 따라서 혹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복자(福者)에 이론에는 밝으나 실천에는 어두운 지식인 또는 머리는 명석하지만 가슴은 비정한 학자가 포함되지 않을까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이론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로 양분함으로써 학문과 정치의 독자적 영역을 확보해 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론과 실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간극 또한 크게 벌어진다. 

이에 비해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보다 일관적이고 통합적인 행복관을 개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어떤 완전한 것이라는 통념에 호소하면서 행복을 ‘완전한 덕에 따른 완전한 삶의 실현’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완전한 덕이란 부분적인 덕이 아니라, 총체적인 덕을 의미하고, 완전한 삶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닌 인생 전체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요컨대, 행복은 인생 전체에 걸친 총체적 덕의 실현이다. 이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를 결여한 학자나 성격적 덕을 갖추지 못한 지식인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총체적인 덕을 ‘아름답고도 좋음’(kalokagathia)이라고 부른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이에 상응하는 논의가 없다. ‘아름답고도 좋음’은 고대 그리스의 인간 교육의 이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제대로 배운 자는 지성의 덕과 성격의 덕을 겸비해야 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 펼쳐진 행복관은 포괄적인 동시에 이상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의 정의에는 외적 좋음이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와 명예, 건강 등은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외적 좋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거나 행복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물론, 외적 좋음은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가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잘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준다. 따라서 외적인 좋음이 그것의 본래 가치를 발휘하도록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적 좋음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내면의 덕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적 덕의 실현과 지성적 덕의 실현을 상호 독립적인 목적들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는 그 목적들이 위계적으로 상호 연계되어 있다고 보았다. 성격적 덕의 실현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지만, 무제한적으로 추구되지 않는다. 실천적 활동은 우리 안의 관조적 능력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한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행복한 삶의 중심은 관조적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을 그는 신을 모시는 일이라 칭한다. 이 때, 신은 우리 안의 관조적 능력, 즉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신을 모시는 관조적 활동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인간 행위의 최종 목적이며, 행복의 정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행복관에 기초하여 인간 활동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 공동체를 구상했다. 이런 시각에서  그가 묘사한 인간 행복은 한 고립된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의 목적이 행복을 아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우데모스 윤리학』을 읽는다고 해서 곧장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행한 마음을 위로해 주지도 않고, 잘못된 생각을 고치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고 명료하게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인생의 목표를 찾는 사람에게 과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급하지도 해이하지도 않게’ 스스로 분별해 보라고 권하면서 행복에 대한 자유로운 논의로 초대한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송유레 경희대학교·철학

경희대 철학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주창자인 플로티누스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영혼의 상승과 하강: 플로티누스의 돌봄의 윤리학』 (독일어), 『덕의 귀환: 서양편』 (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도즈(Dodds)의 『불안의 시대 이교도와 기독교인』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덕의 미메시스: 플라톤의 시(詩) 개혁」, 「의지의 기원과 이성적 욕망: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망 개념 연구」, 「영혼의 모상: 플로티누스의 자연과 영혼의 구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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