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윤리 –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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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윤리 –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2.0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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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20강〉_ 문광훈 충북대 교수의 「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 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3. 문학 제20강 문광훈 교수(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강연의 앞부분과 결론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문학의 윤리 –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문광훈 교수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이라는 소설을 그 “작품에 밀착”하여 “면밀하게 읽으면서” 그렇게 “읽은 것의 바탕 위에서 점차 작품 밖의 사회적 테두리”로 나아가 살핀다. 이는 “모든 방법론으로부터도 몇 걸음 물러나 글/문학이란 무엇인지, 이 문학 작품이 그리는 인간과 그 현실은 어떠한지, 나아가 그렇게 그려진 인간과 현실의 일정한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물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밝힌다. 다시 말하여 “궁극적으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란 “그 작품을 작가와 더불어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이렇게 생각한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보는 것, 나아가 이렇게 표현한 것을 독자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해보는 것, 그래서 이런 적용 속에서 그 작품의 에너지를 ‘얼마나 자기 삶의 변형적 계기로 삼을 수 있는가’에서 잠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입론에 터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론적으로는 『이성과 감성』에 대한 심도 깊은 독해를 통하여 첫째 “감정 탐닉과의 거리 두기”, 둘째 “언어의 정확한 사용”, 셋째 “‘문학적 이성’의 가능성”을 탐사해본다. 

 

지난해 12월 18일, 문광훈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2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2. 2. 대략적 줄거리 

이야기의 중심에는 서식스(Sussex) 지방에 사는 대시우드(Dashwood) 가문이 있다. 이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노어랜드 파크(Norland Park)에 자리잡고 살았는데, 그 소유자는 늙어가면서 자신의 법적 상속자로 조카인 헨리 대시우드(Henry Dashwood)의 가족을 불러들인다. 헨리 씨는 첫 번째 결혼에서 아들이 하나 있었고, 두 번째 결혼에서 세 딸을 갖게 되었다. 소설 『이성과 감성』은 이 세 딸—첫째인 엘리너(Elinor)와 둘째 메리앤(Marianne) 그리고 셋째 마거릿(Margaret)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주인공은 엘리너와 메리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은 오스틴이 36살 때인 1811년에 출간되었지만, 그 원작의 제목은 ‘엘리너와 메리앤’이었고, 이 작품은 그녀가 이미 19살 때 쓴 것이었다.)

소설 『이성과 감성』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남겨진 대시우드 집안의 어머니와 세 딸이 원래 살던 노어랜드의 집을 떠나 시골집으로 옮긴 후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노어랜드 파크의 원래 집이 이복오빠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아들은 죽은 생모로부터 상속을 충분히 받아 이미 부유하고, 결혼으로 더 부유한 형편이었다. 그래도 대시우드 집안의 재산은 아내와 딸들에게 증여되는 게 아니라 아들에게 상속된다. 여기에는 장자 상속제의 모순과 부당함이 자리한다.6) 돈과 토지를 비롯한 귀족의 재산은 세대에서 세대로 오직 장남에게 전해진다. 그러면서 가문의 이름과 토지가 보존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첫째 아들과 그 밖의 아들, 그리고 아들과 딸 사이에는 엄청난 사회경제적 차이가 생겨난다.

이 『이성과 감성』의 중심에도, 오스틴의 여느 다른 소설이 그러하듯이, 연애와 결혼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건만 다뤄지는 게 아니다. 남녀 사이의 만남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크고 작은 교류와 이 교류에서 작동하는 우정과 오해, 믿음과 배반과 기쁨과 불화도 다뤄진다. 나아가 각 개인의 추측이나 판단, 감성이나 이성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또 이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어떠한 취향과 습관과 가치관을 이루면서 어울리고 충돌하는지 지극히 세심하고도 냉정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이성과 감성』에서 맏딸 엘리너는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는 여성이다. 그에 반해 동생 메리앤은 열정적이어서 자기 감정에 충실하다. 마치 엘리너가 신중한 나머지 때로는 무미건조하게 보이기도 하듯이, 다정다감한 메리앤은 맹목적이고 충동적으로 비칠 때도 있다. 이런 대비되는 성향은 엘리너가 내성적이고 양심적인 청년 에드워드(Edward Ferrars)를 만나고, 메리앤이 멋지고 적극적인 청년 윌러비(Willoughby)를 만나면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갈등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소설 『이성과 감성』은 이 두 쌍의 연인들—엘리너와 에드워드, 메리엔과 윌러비 사이의 사랑과 좌절, 믿음과 배반의 고통, 그리고 기다림의 기나긴 곡절을 다룬다.

 

2. 3. 주요 인물 

『이성과 감성』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일은 어느 인물에서나 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 몸짓과 표정과 태도에 일정한 뉘앙스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오르기 몇 시간 전에 서너 대의 피아노 가운데 가장 좋은 ‘소리 색채(Klangfarbe)’를 내는 하나의 피아노를 그날의 동무로 선택하듯이,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피아노가 작곡가에 따라, 또 작품의 종류와 형식에 따라 무한하게 다른 소리 색채의 뉘앙스를 드러내듯이, 오스틴의 언어에 담긴 대화와 행동과 장면과 풍경은 제각각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뉘앙스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이 소설 언어의 뉘앙스는 사건이나 장면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그리고 그 편차는 때로는 공감을 일으키며 납득할 만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엉뚱하여 얼토당토않게 보이기도 한다. 납득할 만한 공감을 보인다면, 그 인물은 우리가 ‘동행할 만한’ 경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은 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그래서 독자는 그 행동에서 거리감을 느낀다.

이 거리감에서는 행동의 모순과 이 모순으로 인한 우스꽝스러움이 느껴질 것이다.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소설의 방법이 ‘서사적’이라면, 이 거리감의 내용은 ‘반성’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서사적 거리감과 반성적 거리감은 같이 간다. 이 둘 속에 비판적 유보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서사적이면서 동시에 반성적인 거리감에서 우리/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 방식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 방식에서 몇 걸음 물러나 그보다 나은 행동적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모색한다.

오스틴의 소설 작품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이성과 감성』도 여러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크고 작은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그 재미는 단순한 재미로 그치는 게 아니라, ‘성찰적 재미’다.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재미’ 말이다. 그래서 도저한 통찰이나 심각한 비판을 내포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나직한 호응이 있는가 하면, 독특한 관찰을 담기도 하고, 신랄한 풍자나 비난도 없지 않다.

이런 제각각의 시각과 논평은 저자의 살아 있는 삶의 의식을 느끼게 한다. ‘삶의 의식’이란 말 그대로 생활 의식이고 생명 의식이며 생활 감각이다. 오스틴은 제각각의 등장인물에서 드러나는 모든 감정적 스펙트럼을 마치 올림포스의 신처럼 전지적으로 아우르면서, 이 인물들 위에서 때로는 이들의 어떤 면에 공감하고 때로는 어떤 면을 해부하고 진단하면서, 현실에 대한 넓고 풍부한 독해 속에서 삶을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비판적 공감에서 출발하는 이런 포용적 전진의 결과가 곧 작품 『이성과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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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한’ - 결론 

소설 『이성과 감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중심 인물과 주변 인물로 나뉠 수 있다. 엘리너와 메리엔, 에드워드와 윌러비 그리고 브랜던 대령이 중심 인물이라면, 그 밖의 인물들—대시우드 부인이나 미들턴 부분, 루시 양이나 펠라스 부인 같은 이들은 주변 인물에 해당된다. 이 중심 인물은 작가에 의해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좋은 점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메리엔만 하더라도 열정적이고 솔직한 반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아집이 강한 성격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윌러비는 활기 넘치는 인물이지만 사치스럽고 방탕하다. 그에 비해 엘리너는 신중하지만 무미건조한 면이 없지 않다. 엘리너의 상대인 에드워드도 그렇게 보인다. 그는 지극히 선하고 양심적인 인물이지만, 때로는 무덤덤하여 생기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에 비해 브랜던 대령은 근엄하여 다가가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장단점에도 이 소설의 인물들은, 적어도 주된 인물들의 성격적 윤곽은 실감 있게 묘사된다. 그래서 흥미로워 보인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엘리너와 에드워드였다. 엘리너에게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이 두드러졌다면, 에드워드는 내성적이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드러나듯이, 사안에 대하여, 그것이 사람에 대해서든, 사회나 현실에 대해서든, 아니면 자연의 풍경에 대해서든, 그 누구보다 설득력 있고 정연한 견해를 갖고 있다. 돈이나 명성 혹은 자리보다 ‘사적 평온’을 중시하고, 자기 삶을 살려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나아가 아름다움과 쓸모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그의 미의식도 각별해 보였다.

삶의 다양한 방식에 대한 작가의 이 모든 조명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오스틴이 이런 묘사를 통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상투적이지 않은 삶—“그 전날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55), 나날의 삶을 새롭고도 신선하게 살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활기, 이런 명랑한 즐거움이 필요한가? 삶에 대한 깊은 향유란 이런 명랑한 에너지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교육을 통한 성격의 개선, 그리고 이 개선을 위한 “지속적이고도 고통스러운 노력” 속에서나(247) 실현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앞서 보았듯이, “우리 안에 자리한 최선의 것과 일치하게 살려면 ‘온 신경을 다 쏟아부어야(strain every nerve)’ 한다”고 쓰지 않았던가?24) 자기 통제나 마음의 평정도 이때 요구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통해 오스틴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일목요연한 방식이 아니다. 에드워드가 원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자신의 방식대로 자리하는(in my own way)” 행복의 가능성이었다(90).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추구하고, 예술이 제안하는 행복의 길이 아닐까? 하나의 통일적 방식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제각각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형태 말이다. 문학이 제안하는 것은 각자의 방식대로 존재하는 고유한 삶의 가능성이다. 만약 인간의 삶에 보편성이 있다면, 그것은 외적으로, 혹은 규범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개별적으로만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그래서 결코 대체될 수 없고, 따라서 ‘그 나름으로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가운데서만 실현되는’ 보편성이 아닐까?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세 가지 점에서 하고자 하고, 이것이 이번 강연의 결론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감정 탐닉과의 거리 두기이고, 둘째는 언어의 정확한 사용이며, 셋째는 ‘문학적 이성’의 가능성이다.

 

4. 1. 감정 탐닉과의 거리 두기 

메리엔이 주관적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살아간다면, 엘리너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지속적으로 검토한다. 엘리너의 분별력이 이 검토로부터 생겨난다. 여기에서 감성과 이성은 어느 한편에 쏠려 있지 않다. 그것은 늘 작동하고 어디서나 적용된다. 그러면서 삶의 표면을 뚫고 그 깊이에 이른다. 분별력이 삶의 깊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인물들의 삶은 끊임없는 모임이나 회합 혹은 행사 속에서 소진되는 듯하다. 그러면서 현실의 표면에 머문다. 존 대시우드 부부나 미들턴 부부 혹은 제닝스 부인이 그렇다. 이들은 정찬이나 댄스파티, 카드 게임이나 사냥 등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들에게는 먹고 마시고 떠들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다. 이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 이들은 쉼 없이 얘기를 나누지만, 그 대화의 내용은 빈곤하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별 관계없는 잡담의 연속인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삶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듯이, 이처럼 불필요한 잡담처럼 탕진된 채 고갈된다.

사람들의 대체적 삶이 현실의 표면에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교육과 본성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교육하고 노력하지 않는다. 작가는 엘리너와 메리엔 자매를 통해 이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엘리너가 특히 그렇다. 그녀가 페라스 부인의 냉담과 무례를 견딜 수 있는 저력은 그녀 자신의 지속적 노력 덕분이다. 메리엔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평소에도 독서와 음악을 즐긴다. 이 둘은 동생이나 엄마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의 감각과 이성을 키워나간다. 이것은, 앞서 보았듯이, 작가 오스틴 집안의 실제적 모습이기도 했다. 메리엔이 가장 싫어하는 하나가 상투성—진부한 느낌과 말과 사고였다.

그러나 교육과 노력의 결핍이 삶의 상투화에 대한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회의 규칙은 지나치게 다른 것—다른 삶의 기준과 가치에 너그럽지 못하다. 메리엔의 격정적 행동이나 열정적 태도가 사람들 사이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이 정해진 구조 속에서 정해진 언어—규격화된 뜻과 기호와 관습을 산출해낸다. 그리고 이렇게 산출된 약호 체계를 그 구성원이 따라주길 바란다.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이렇게 주어진 언어를 이런저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미리 정해진 이 같은 언어로 자신의 의식을 만들고,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조금씩 형성해간다. 가치의 구성이나 규범의 확립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언어의 의미론적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회적인 것이 압도하는 공간에서 진실한 언어는 제대로 자리하기 어렵다. 순수한 개인의 언어도 있기 어렵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언어에는 집단적 강령과 규율이 부지불식간 섞여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언어는 어느 정도 오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심한 경우, 그 언어는 기만적이다. 아마도 사회가 집단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이런 집단적 강제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 사회는 개인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허용할 가능성이 낮다. 그것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그 나름의 고유성을 그만큼 금기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금기를 개인은 웬만한 다짐이나 결심 없이 무시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생각 있는 사람들의 감정과 꿈은 내적 세계로, 꿈이나 그리움 혹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추방된다. 몸에 병이 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윌러비가 떠나간 후 메리엔이 몸져눕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메리엔은 윌러비와의 실연 이후 두통을 앓고 기침을 하면서 몸이 약해진다. 그녀는 완전히 낙담하여 외모에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옷차림에도 무감각해진다. 그러면서 위독한 지경에 이른다. 그녀는 자신이 탐독한 작가 쿠퍼(W. Cowper)처럼 미치기 직전의 증상을 보인다. 실제로 18세기의 여러 낭만파 시인은 정신착란 같은 신경증적 질병을 자주 앓았다. 정신의 착란은 이성의 위기다. 사람의 꿈이 현실보다는 상상 속에서 키워지고, 이렇게 키워진 상상력은 소설 같은 허구적 작품 속에서 구현된다. 하지만 상상 속의 이 현실이 실질적 효력을 갖기란 어렵다.

그리하여 꿈꾸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거짓 현실과 타협하여 이 현실에 순응한 채 살아가거나, 거짓 현실에서 물러나 자기 속에 칩거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그는 현실에서 제 자리를 찾기 어렵다. 소외된 인간은 인간이 없거나 드문 곳을 찾는다. 그는 돈과 상업, 물질과 권력으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기존 영토 밖의 장소로, 그래서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옮아가고자 애쓴다. 그러면서 다시 사회로 돌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영영 못 돌아오기도 한다. 다행히 메리엔은 치명적 열병을 앓은 후 좀 더 분별력 있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전환 없이, 현실의 표면에 머문 채, 껍데기 같은 삶을 계속 살아간다. 사회화 과정이란 얼마나 많은 잔혹함과 악의 그리고 억압을 수반하는가?

 

4. 2. 언어의 정확한 사용 

『이성과 감성』에 나오는 인물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곳곳에 오해와 착각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존 대시우드 부부이고, 에드워드의 동생 로버트 페라스이며, 그리고 스틸 양이다. 아니면 메리엔이 사랑한 윌러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윌러비는 번지르르한 외모에 그럴듯한 말을 쉽게 구사한다. 스틸 양은 존 대시우드 부부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부의 말을 곧잘 쏟아낸다. 하지만 자신의 속됨이나 천박함을 의식하지 못한다. 존 대시우드는, 마치 로버트 페라스가 그러하듯이, 상당한 수입을 상대방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들에게 상업적인 것과 영혼적인 것은 뒤섞여 있다. 그들은 지적이고 정신적이며 영혼적인 사항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누락된 자질은 여럿이다.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사항은 무엇일까? 이런저런 자질이나 미덕의 미비 이전에 언어의 오용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그래서 ‘사실에 부합되게’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언어의 부정확한 구사가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다. 언어의 오용은 물론 언어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남용이고 사고의 악용이다. 언어의 오용은 곧 삶의 오용인 것이다.

소설 『이성과 감성』이 감성 혹은 감수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면, 우리의 독서는 결국 이성에 대한 능력의 연습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성적 능력의 연습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출발은 언어의 정확한 사용에 있을 것이다. 이때 기준은 대상의 크고 작은 차이이고, 이 차이의 미묘하고 복잡한 동역학이다. 언어란 이 미묘하고 복잡한 대상이 지닌 동질성과 이질성, 차이와 대조와 변주의 경로를 섬세하게 쫓아갈 때, 정확해진다. 그때그때 상황에서 최대한으로 ‘사실에 즉하여’ 말을 사용하는 것, 그래서 쓸데없는 미화나 과장을 삼가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감정의 탐닉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고 사고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감성과 이성, 감수성과 합리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일은 이와 다른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언어의 정확한 구사는 그 자체로 감정 탐닉과의 거리 두기이고, 이 거리감 속에서 객관성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이성의 능력을 연습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인이 도덕적 자아로 성장하는 것은 무엇보다 정확한 언어 구사의 연습을 통해서다. 하지만 이 일은 간단치 않다. 루시 양의 눈먼 칭찬 앞에서 엘리너가 자주 말문을 잃듯이, 우리는 수긍하지 못할 일도 때로는 받아들여야 하고, 이 당혹스러운 일 앞에서 가끔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제약 속에서도 언어 사용의 모범적 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역시 엘리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녀의 언어는 정확하고 풍부하며 유려하다. 감정적 표현에 있어서나 지적 정신적 지각에서나 그녀의 어휘 목록은 다채롭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지각하는 대상을 늘 분명하게 부른다. 그녀의 감정이나 경험은 정확하고 선명한 어휘 속에서 자신의 윤곽을 드러낸다. 아마도 삶의 기쁨과 행복은 이처럼 정확하고 다채로운 언어를 신중하고도 유연하게 사용하는 데서 자라나올 것이다. 나아가 정확한 언어 사용은 각자의 삶에 품위와 평화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분명하고 정확한 언어 사용은 그 자체로 사려 깊은 마음이나 이성적 능력 그리고 윤리적 자의식의 수준을 증거한다. 그런 점에서 엘리너는 엘리너를 창조해낸 작가 오스틴의 다른 자아로 보인다.

 

4. 3. 심미적 감수성 - ‘문학적 이성’의 가능성 

오스틴 문학이 지향하는 감성과 이성은, 되풀이하건대, 어느 한편의 감성과 이성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감성의 이성이자 이성의 감성에 가까울 것이다. 말하자면 감성이되 이성적 요소를 포함하고, 이성이되 감성에서 시작하고 확인하는 상태다. 이것을 우리는 ‘문학적 이성’이라고 부를 수 없을까?

그렇다면 문학적 이성은 감성과 이성 사이의 조화, 그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 균형은 고정되고 경직된 게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그래서 유동적이다. 문학적 이성의 유동성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적응할 수 있다. 문학적 이성은, 퇴계 선생의 말을 빌려, 주일무적수작만변(主一無敵酬酌萬變)의 태도와 비슷한 것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그때그때의 사건에 감각적으로 주목하고(그런 점에서 구체적이며 개별적이고 경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경험하는 개별적 사안을 지성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한다(그런 점에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이 이성적 검토를 통해 개별적 사안은 경험을 넘어 일반적 차원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 상태는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또 문학예술 일반에서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체에서도 핵심적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전환을 통해 질적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전환은 심리적으로는 ‘고양(高揚)’의 과정이고, 철학적으로는 ‘지양(止揚)’의 과정이며, 미학적으로는 ‘승화(昇華)’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심미적 경험의 의미는 결국, 그것이 어떻게 불리건, 고양이든 지양이든 승화든 관계없이, 이렇게 일어나는 실존 변형적 경험으로 수렴된다. 심미적 경험은 변형의 경험이고, 변형의 사건이다. 이 같은 변형은 경험의 주체인 나/자기/개인에게서 일어난다. 즉 심미적 경험은 주체의 자기 변형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이 글에서는 오스틴의 소설인 『이성과 감성』을 매개로 일어나기에, 문학적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다시 ‘3장 2절 성격의 윤리학’에서 ‘문학의 윤리’로 돌아간다.

 

거듭 강조하건대, 문학적 이성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도덕 교과서에서처럼 무슨 설교나 훈계의 형태로 말해지지 않는다. 또 철학서에서처럼 논증하거나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껏 보아왔듯이, 여러 사람들의 삶을 여러 사건과 상황 속에서 ‘그려 보이는’ 가운데 경험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려 보인 것—묘사된 내용에 대하여 우리는 공감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아니면 아무런 느낌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문학의 언어는 그 어떤 것도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문학의 언어는 독자/수용자의 전적인 자발성을 존중한다.

근대 사상의 한 핵심이 인간 개개인의 ‘자발성’에 대한 존중에 있다면, 이 인간의 자발성에 상응하는 것이 곧 예술 작품의 ‘자율성’ 원리다. 이 자율성의 원리야말로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발성에 대한 근대 철학의 관심과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근대 미학의 관심이 의미론적으로 서로 만나는 것을 확인한다. 이 둘—인간의 자발성과 예술의 자율성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근대 사회가 획득한 문화사적 성취의 가장 빛나는 유산으로서, 또 인문학 정신의 바탕으로서 자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성 혹은 심미적 감수성 속에서 일정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이 균형은 무엇보다 엘리너와 메리엔에게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엘리너는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 일정한 질서와 예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부단히 검토한다. 이에 반해 메리엔은 언제나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며 밝히고 표명한다. 메리엔이 표현적 열정의 주체라면, 엘리너는 성찰적 절제의 주체다. 작가 오스틴은 이 둘—표현과 성찰, 열정과 절제 사이에서 하나의 균형을 이루며 자리한다. 윤리적 인간이란 이 균형을 체화한 사람의 이름이다.

다시 묻자. 어떤 균형인가? 그것은 감성과 이성, 충동과 절제, 혹은 더 넓게 보아 산문과 시 사이의 균형이다. 이 균형은 삶의 균형에서 잠시 완성된다. 그러나 이때의 균형은, 되풀이하건대, 굳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균형이고, 따라서 역동적 균형이다.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움직이는 균형 상태—우리의 마음이 지향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아마도 이 균형적 마음의 상태야말로 사회적 삶의 조건에 대한 오스틴의 메시지가 아닐까?

이 균형 속에서 우리는 삶을, 아마도 깊은 의미에서 그리고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의 향유를 ‘균형적 향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 이성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삶을 균형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 어떻게? 책을 읽고 느끼며 감상하고 음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시험하고 사고를 단련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과 사고의 훈련은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부르고’, 그 경험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서 기쁨으로 바뀐다.

 

사실 문학의 행복은 이름 짓기의 행복—명명적 구성 활동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불리울 때, 익명의 대상이 마침내 자신의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름 없던 것들이 자기 이름 속에서 비로소 자기 존재를, 그 존재의 현존적 권리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존재하는 것들의 위엄이나 자연의 기쁨, 나아가 삶의 평화도 이 이름 짓기에서, 이 이름 짓기에 깃든 사물과 언어의 일치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쉼 없이 노력하고 연마하는 한, 그래서 때로는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나 즐거움을 거스르기도”(229) 하면서 선함을 추구할 수 있을 때, 나아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기대를 저버리는 일을 두려워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곧 에드워드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엘리너가 침착함을 유지함으로써 “자기의 주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333).

결국 작가 제인 오스틴이 높게 평가한 것은 사려 깊은 마음과 온화한 성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정서적 반응을 넘어선다. 그것은 감성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에서 공감의 능력이나 향유의 의지도 나온다. 그러므로 감성과 이성을 아우르는 일은 비유적으로 시와 산문의 정신을 포함하는 일이고, 나아가 충동과 자제 사이를 오고 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감성과 이성 사이를 오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각자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각자에게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각자가 각자에게 어울리는 이름 속에서 조화롭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사려 깊으면서도 온화한 성정을 이미,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풍경을 보고 느끼며 동료 인간들과 어울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깊은 의미의 문명화된 실존이다. 아마도 이것이 작가가 염두에 둔 인간적 높이일 것이다.

대체 인간의 삶에 자기 삶을 사는 기쁨 외에 어떤 다른 그 무엇이, 어떤 더 본질적인 가능성이 있겠는가? 그것은 높으면서도 지금 여기에 충실하다. 그것은 나에 집중하면서도 나 밖으로 열려 있다. 그래서 밀도 높다. 나는 이것이 문학의 가능성이고 예술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오스틴이 『이성과 감성』에서 펼쳐 보이는 문학의 윤리학도 삶의 이런 충일한 가능성에 대한 권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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