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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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주명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1.2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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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_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혁명의 특효약인가, 위약인가?』 (휴 고프 지음, 주명철 옮김, 여문책, 288쪽, 2021.11)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발표와 7월 관련자 사형언도, 이듬해 4월 8일 대법원 형확정 판결, 그리고 이튿날 형집행으로 보듯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민혁명당사건(人民革命黨事件) 참조], 박정희 정권은 독재자 개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다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 시절을 겪으면서 나는 프랑스 혁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오늘까지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프랑스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 민주주의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적 현실이 서로 다르긴 해도 공포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박정희는 1961년에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혁명공약’을 내걸더니, 10년 동안 자신이 한 ‘혁명’의 실패를 인정하듯 1972년에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 긴급조치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반대자를 탄압했다. 대학생들은 겨우 돌이나 던지는 시위로 저항하다가 관할경찰서에 끌려가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면서 반정부조직의 빈칸에 이름을 올리든가 다른 학생의 행방을 취조 받았다. 나는 ‘수도육군병원’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신체검사를 받은 경험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유신독재 정권과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은 집권 과정이 달랐음에도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폭력성과 의도를 가졌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유학시절에 전두환이 국빈방문을 거절한 프랑스를 방문한다는 소식과 함께 방송에서 틀어준 광주학살 영상을 보면서 그의 집권과정과 독재가 국제적인 공분의 대상임을 실감했다. 

‘테뢰르terreur’는 공포 또는 공포정으로 옮기는 말로, 개인이나 집단이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사용할 것임을 확신시켜 반대파를 두렵게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공포정은 모든 정치체에서 집권자가 통상절차를 정지시키고 긴급절차를 마련해서 자기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는 수단인데,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은 그 나라 처음으로 성문헌법을 제정하고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체제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게다가 민주적 선거로 뽑은 국회가 1793년 6월 헌법의 효력을 정지하고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해서 공포정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당시나 지금이나 찬반토론의 대상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귀를 막고 토론하는 형국이니 합의에 이르기도 어렵다. 

역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자. 휴 고프 Hugh Gough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The Terror in the French Revolution』 초판(1998)에서 “보수주의자는 혁명을 비난하고, 수정주의자는 혁명의 유산을 애매모호한 것으로 여기며, 상황론자들은 혁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수주의자는 ‘상황론’이 살인자보다는 희생자를 비난한다고 보았다. ‘상황론’ 지지자들은 조직적 공포정이 산발적인 폭력에 맞서기 위한 수단이며, 오로지 1793년 초에 대외전쟁이 혁명을 위협할 때 발생했고, 1794년 여름에 위협이 사라지자 단번에 끝났다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역사가가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20세기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상황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정주의는 1960년대 초반 소련과 프랑스의 공산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젊은 세대의 대다수를 멀어지게 만들고, 그동안 혁명의 해석을 지배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가운데 뿌리내렸다. 1950년대부터 이미 영미 역사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본질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고, 1965년 프랑스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는 혁명이 봉건제에 반하여 일어난 부르주아의 혁명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 대신에 ‘봉건적’ 귀족과 부유한 중간계급을 모두 포함한 사회적 지도층의 작업[엘리트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공포정을 반혁명과 전쟁이라는 ‘상황’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대신, 진보적 개혁을 극단주의와 폭력으로 ‘미끄러지게’ 한 일련의 정치적 오류라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공포정은 암(癌) 같은 잠재적 존재로서 잘 다스리기만 하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망명귀족의 처형(Nine émigrés are executed by guillotine, 1793) 출처: wikipedia

휴 고프는 공포정을 폭력으로 보는 보수주의자, 상황의 산물로 보는 좌파, 집권자들이 자기 잘못까지 희생자들에게 전가하는 수단으로 보는 수정주의자가 모두 불완전하나마 프랑스 혁명의 진실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들의 약점을 아는 역사가들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문제의식과 방법론으로 프랑스 혁명의 쟁점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휴 고프는 초판이 나온 지 12년 만(2010)에 제2판을 발간하면서 1990년대 이후, ‘상황론’을 비판한 ‘수정주의’에 대한 대답을 다각도로 찾는 역사가들이 ‘후기 수정주의’라 할 수 있는 업적을 내놓았다고 말한다.   

미국의 이서 울럭은 공포정이 정치적 근대화를 고양시키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조한 긍정적 측면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파트리스 이고네는 자코뱅파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또 장 피에르 그로스는 공포정 시기에 국민공회가 지방에 파견한 의원들의 활동을 분석해서 울럭과 이고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미국의 티모시 타케트는 수정주의자가 보수파의 주장에 동조해서 1789년에 공포정의 기초가 확립되었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고, 혁명기에 일어난 사건의 추이를 면밀히 조사해야 온건한 의원들과 대중이 어떻게 급진주의로 나아갔는지 밝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정주의자 퓌레는 이념이 1789년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지만, 타케트는 이념보다는 혁명파와 보수파의 불신을 심화시키는 사건들에 더 주목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재정권의 공포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보수파는 박정희 독재가 분단 상황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눈부신 경제발전이 독재의 덕이라고 해석한다. 진보파는 박정희 독재와 전두환 독재의 폭력성을 강조하고, 경제발전에서 독재자의 몫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해도 교육 수준이 높은 국민의 몫이 훨씬 더 크며, 경제의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인은 일제강점기를 겪고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이후 민간인 학살과 정적 살해의 형태로 공포정을 경험하다가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 독재정권을 4.19 혁명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새로운 독재정권 시기를 맞았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18년을 공포정으로 집권하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공포정의 명분에는 항상 ‘북괴’라는 망령이 있었다.

좀 더 긴 안목으로 우리의 역사를 보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혜택을 얻은 사람들의 후예가 반공을 외치고, 우리에게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사이좋게 지내야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텐데, 오히려 북한을 ‘멸공’으로 없애야 할 주적이라고 보는 세력이 존재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도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쓴다. 그들은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시절의 경제발전을 앞세워 독재와 공포정도 미화한다. 

천 년 동안 봉건왕국에서 절대군주국으로 발전한 프랑스에서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좌파와 우파는 정치적 성향이 달랐어도 어떻게든 민주주의 혁명을 순조롭게 진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790년 이후 봉건적 잔재를 폐지하고 국교인 가톨릭교의 지위를 낮추는 성직자시민헌법을 제정한 뒤에 좌파와 우파가 본격적으로 불신의 벽을 쌓아가면서 음모론이 횡행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루이 16세가 국경지대로 도주했다가 잡힌 뒤 입헌군주제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이미 생긴 불신의 벽을 허물지 못했다. 혁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세력이 국내외의 전쟁을 일으키고 공포정이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초기의 명분을 충실히 실천하는 가운데 점점 더 급진화했고, 국내외에서 닥친 위기를 해결할 방법으로 결국 공포정을 택했다. 

그러나 한국의 공포정은 반민주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고, 정통성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허울 아래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던 정책이었다. 다행히 ‘촛불혁명’으로 새 정부가 탄생하고 그 성패를 가름할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오늘,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있으므로 공포정을 역사책에서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정변을 꿈꾸는 자가 아직도 곁눈질로 기회를 엿볼지 모르겠지만, 민주시민들이 늘 깨어 있으면서 진실을 드러내면 공포정의 명분은 고개를 내밀 틈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주명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서강대 영문과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파리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부터 2015년 여름까지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문화사학회, 역사학회, 한국서양사학회 종신회원, 한국서양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대서사의 서막』, 『1789』, 『진정한 혁명의 시작』, 『1790』, 『왕의 도주』, 『헌법의 완성』, 『제2의 혁명』, 『피로 세운 공화국』, 『공포정으로 가는 길』, 『반동의 시대』(프랑스 혁명사 10부작), 『바스티유의 금서』(이후 『서양 금서의 문화사』로 재출간), 『지옥에 간 작가들』, 『파리의 치마 밑』,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 『계몽과 쾌락』,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등이 있고, 앙시앵레짐과 프랑스 혁명 관련 책을 여러 권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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