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을 기호학으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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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기호학으로 읽다
  • 박연규 경기대학교·철학
  • 승인 2022.01.0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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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주역의 기호학: 퍼스 기호학으로 보는 卦의 재현과 관계』 (박연규 지음, 예문서원, 352쪽, 2021.11)

 

주역을 기호학으로 설명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주역은 기원 전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이고 기호학은 100년의 역사도 갖지 못한 유럽과 영미의 철학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데다가 학문의 방법이나 목적도 다르며 쓰임새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이 다른 철학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정도이다. 비록 주역을 연구 텍스트로 놓고 기호학을 방법론으로 사용한다고 하지만 독자들이 선뜻 동의할까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주역의 기호학>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안과 밖에서 다 나왔다. 주역 전공자들은 기호학을 잘 모르고 기호학자들은 주역을 모른다. ‘학문의 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반반의 연구이다. 어떨 때는 기호학자를 또 어떨 때는 주역학자를 희생시키며 글을 써야 하는 곤혹스러움이 있었다. 그리고 ‘학문의 밖’에서 보면 주역을 인생 지침서나 사주명리의 기본서로 향유하는 수많은 국내 주역 마니아들한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들이 혹 이 책을 구입했다가 실망하지나 않을까, 욕을 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책을 마무리하는 내내 계속되었다.

어젯밤에는 주역 꿈을 꾸다가 새벽에 잠이 깨었다. 올 초에 홍콩 중문대학의 주역 전공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글로벌 이징(The Global Yijing)이라는 주역강좌 시리즈를 만들었고, 유럽과 미국을 포함해 중국, 대만, 일본,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의 주역학자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내년 1월에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데, 아마 그 발표가 신경이 쓰여 그런 꿈을 꾼 것 같다. <주역의 기호학>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괘(卦)를 찰스 퍼스(Charles S. Peirce; 1839-1914)의 기호학으로 분석하는 것이 큰 주제이고, 작게는 그의 도식학(diagrammatology)의 관점에서 진괘(震卦; ䷲)의 이모저모를 설명하기로 되어 있다. 

원고를 마감기한에 맞춰 줘야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50분을 영어로 발표해야 하고 질문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 거기다가 줌(Zoom)에 익숙하지 않아 발표 중 실수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뒤섞여 그런 뒤숭숭한 꿈을 꾼 것 같다. 중국이나 대만, 또는 일본의 학자들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지만 홍콩이나 싱가폴의 학자들은 발음이 특이한 것 외에는 영어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꿈에서는 한국인인 내가 영어로 발표해야 하는 것으로 억울해 했고 잠에 깨어서도 그런 억울함의 여운이 계속 남았다. 나 자신 미국 생활을 통해 영어로의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지만 항상 이런 국제학술대회에 발표를 하려면 내용 전달보다는 영어에 더 신경이 쓰인다. 

악몽일 수도 있는 꿈에서 발표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우뢰를 뜻하는 진괘를 처음에는 재현으로 다음에는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우뢰나 천둥의 상황을 직접 보고 체험해 괘로 표현하는 과정을 재현으로 설명하고, 진괘가 착종(錯綜) 변화되어 간괘(艮卦, ䷳), 손괘(巽卦. ䷸), 건괘(蹇卦, ䷦) 등으로 펼쳐져 나가는 모습을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대화나 소통 등의 단어가 떠올라 모두 세 단계 정도로 진괘를 설명하면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이제 발표를 만족스럽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더해 이 아이디어를 빨리 종이에 적어 놔야지 하는 조바심으로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 종이에 그 내용을 정리하려는 순간, 그렇게 선명했던 아이디어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몇 마디 단어만 기억이 나고 더 이상 정리를 할 수가 없었다. 

<주역의 기호학> 책이 끝나고 난 뒤의 느낌은 답답함이다. 몇몇 학회 동료들이 긍정적인 코멘트를 해 왔지만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주역 공부를 오랫동안 해 왔지만 주역의 여러 논변에 늘 불만이었던 것은 변화와 생생(生生), 의리(義理)와 상수(象數), 아니면 철학사적 담론 추적에 그치는 것이었다. 이것을 한국적 주역 공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해서는 흔히 말해 세상 밖의 철학 시장에 내 놓을 수가 없다. 적어도 그 시장에 내 놓으려면 태극이나 음양 개념을 끝까지 고집해서도 안 되며, 존재론 시장이나 인식론 시장으로 끌어내 제대로 승부를 벌여야 한다. <주역의 기호학>에서 유명론, 관념론, 또는 실재론 등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가져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나의 이러한 공부 태도가 국내 주역 전공자들에게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호학적 실재론’(the semiotic realism)으로 주역철학을 정의하고자 한 것이 이번 책의 기획 의도였다. 이것은 주역의 실체적 사유에 반대하는 논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역 전공자들은 태극이나 음양을 실체적인 것, 즉 존재하는 어떤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존재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 있다. 주역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태극과 음양의 실체는 현실이다. 역사를 거슬러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그러했고, 도가나 불가 쪽의 주역 연구자들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 특히 음양적 사유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거의 굳어졌다시피 되어 오히려 실체가 아니면 이상할 정도이다. 실체적 사고가 거의 몸에 달라붙어 있어 종교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좀 전에 말한 것처럼 한국 밖의 철학 시장에 주역을 내 놓을 수가 없다. 서양철학 쪽은 어떤 식으로든 그 논술의 정교함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새로운 담론으로 시끌시끌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의 주역 연구는 지극히 고요하다. 나는 이것을 <주역의 기호학>에서 동양은 지식 공동체가 아닌 수양 공동체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주역 연구도 지식 공동체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다. 기호학적 실재론으로 주역을 보자는 것은 지금까지의 실체적인 태극적 사유나 음양적 사유에 안티를 거는 것이다. 퍼스 기호학을 가져온 가장 큰 이유도 그의 기호학에 실체적 사유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호학이 다 그렇지만 퍼스에게는 이런 의식이 아주 강하다. 그는 유명론도 공격하고 관념론도 공격하며, 마지막 남은 실재론마저도 해석학적 논의를 통해 제거한다.  

주역을 어떤 관점에서 보든 이제 주역을 규모의 차원에서 규정할 수 있는 논변이 많이 나와야 한다. 비록 <주역의 기호학>에서는 기호학적 실재론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접근을 한 탓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역철학은 무엇이다”라고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주역의 괘가 생성되고 변화되는 전체 과정을 퍼스 기호학의 아이콘, 인덱스, 상징으로 분석해서 구조화했고 괘의 변화 과정까지도 기호로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실재적인 특성을 재현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었고, 변화의 특징을 관계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주역이 어렵다는 생각은 일차적으로는 괘사(卦辭)나 효사(爻辭)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괘효를 풀이한 글이 까마득한 옛날 그 시대의 사례를 압축적으로 열거했기 때문이지 다른 큰 이유는 없다. 여기에 무슨 ‘깊은 우물’ 같은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 어려움은 괘효와 괘효사의 연결 고리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연결고리를 명확하게 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항상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말하면 괘효는 일반기호이고 괘효사는 언어기호이다. 퍼스 기호학이 유효한 이유도 바로 이 괘효사와 사건을 이어주는 괘효를 분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이고 그러한 괘효의 철학적 위상을 제대로 진단하기 때문이다.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꿈을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꿈을 현실의 한쪽에 놓인 부분을 보완하는 것으로 본다. 어제 밤의 꿈도 <주역의 기호학>을 내 놓은 뒤 생긴 여러 걱정을 말해주는 것이 틀림없다. 오히려 걱정에 직면할 기회가 되어 부분적으로나마 자기실현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주역철학을 기호학적 실재론으로 읽어내려는 나의 시도도 조만간 주역학회나 기호학회에서 검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가는 대로 대응을 하면 될 것이다. 융은 근심이 일어날 때면 동전 점을 치고 했다지만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꿈이 이미 많은 얘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박연규 경기대학교·철학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대학교 교양학부에 재직 중이며, (사)아시아교정포럼 인문교정연구소장이다. 주역 외 최근 논문으로는 「레비나스 얼굴 윤리학의 퍼스 기호학적 이해」, 「이우환 〈관계항〉의 윤리적 변용」, 그리고 「유교명상 프로그램의 사례; 정심수련을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이웃의 얼굴이라는 테마로 『얼굴의 윤리학』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저서로 재소자의 몸과 관계윤리를 밝힌 『교정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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