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을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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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을 만드는 ‘사람들’
  • 이은주 서울대 기초교육원
  • 승인 2021.12.0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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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고증학의 시대』 (기노시타 데쓰야 지음, 이은주·김홍매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316쪽, 2021.09)

 

고증학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 공통된 인식은 있다. 대체로 고증학의 비조로 명말청초의 고염무(顧炎武)를 꼽기는 해도 실제로 고증학이 성행한 것은 건륭(乾隆) 가경(嘉慶) 연간이며 이것을 ‘건가지학(乾嘉之學)’으로 특화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 고증학이 청대 학술의 주류였고 대부분 ‘한학(漢學)’과 동일시 한다는 점, 혜동(惠棟), 대진(戴震), 전대흔(錢大昕), 단옥재(段玉裁) 등을 대표적인 고증학자로 꼽으며 경학(經學)을 대상으로 한 훈고(訓詁), 고음(古音), 문헌고증(文獻考證) 등의 연구방식이 특징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특징을 가진 청대 고증학이 어떤 계기로 성립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분분한 해석 중에는 송명이학(宋明理學)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고 만주족의 고압적인 정책 아래에서 박해를 피하려고 경서에 파고들었다고 보기도 하며 또 명말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학(西學)의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경향도 있다. ‘건가지학’에 주목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건륭 가경 연간에 가장 성행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청대의 여러 상황과 학술계의 동향에 따라 다각도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지만 18세기, 고음 규명이라는 새로운 연구방식, 강남(江南) 학술 네트워크, 종족(宗族)이라는 몇 개의 키워드는 건륭 가경 연간의 가장 성행한 고증학의 성격을 특징짓는 단어가 될 것이다.

 

                                                                      건륭남순도

저자인 기노시타 데쓰야(木下鉄矢, 1950∼2013)가 고증학을 바라볼 때에도 이미 제기된 몇 가지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다. 곧 저자는 고증학을 송명이학 같은 사상사적 흐름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이것이 고증학이 가진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한 시대의 학술 경향을 바라보는 저자의 독특한 관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고증학’이 단일한 양상과 지향성을 가진 어떤 흐름이 아니라 이 시대의 여러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여러 사람들 개인의 복잡다단한 활동을 아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떤 사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개인들의 활동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특정한 경향성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건륭제
                         건륭제

그렇다면 건륭 가경 연간인 18세기 사람들은 어떤 현실에 놓여져 있었을까. 이 책의 4개의 장에서는 이 문제를 여러 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각 장의 내용은 그 안에 몇 가지 질문을 숨겨두고 있다. 경서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인데 이들은 어떤 계기로 과거 시험용 경서 공부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과 방식으로 경서에 접근했을까. 만주족이라는 이민족 왕조의 억압을 피해 경서 속으로 침잠한 것이라면 이것이 왜 이 시기에 고음 분석 같은 정치한 방식을 동원해 이루어졌을까. 건륭제의 사고전서 사업이 이들 고증학자들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을까. 그렇다면 가경제 이후에 이런 학술의 흐름이 지속되지 않게 된 요인에 시대 분위기의 변화도 가세한 것이 아닐까.

 

                                                                       사고전서

이런 큰 질문 외에 개인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바늘구멍처럼 좁은 문을 통과해 광동 학정까지 오른 전대흔이 왜 갑자기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에 잔류하여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을까. 청 왕조에서 전대흔이 벼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청 초기에 이루어진 한인들의 학살과 그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조명했던 것일까. 건륭제가 어느 시점부터 대규모의 문자옥(文字獄)을 매우 자주 일으키게 된 심적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건륭제는 당시 사회를 어떻게 보았을까. 문자옥이나 『사고전서』 사업은 모두 건륭제의 어떤 불안한 심리와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고증학자들은 비(非) 관료로서 강남 네트워크 속에서 학술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원래부터 관료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대흔은 그래도 자신이 관료로 복귀하지 않는 선택을 했지만 홍양길(洪亮吉)은 간언을 했다가 유배길에 올랐고 사면령으로 고향에 돌아가서 살았다. 이들은 확연하게 관료의 길을 택하지 않은 전문 학자가 아니라 관료였기도 했고 당시 시정(時政)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견 번성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시대에 이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견인된 세계가 아니라 ‘강남’으로 대표되는 성격이 조금 다른 세계에서 국정이나 현실정치와는 무관해 보이는 또 다른 세계로 침잠하고 있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화신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안에 이 시기의 다채로운 면들을 담고 있다. 과거 시험을 치러 북경으로 모이는 사람들의 양상과 인구가 늘어나면서 유동인구도 늘어나는 시대적 상황, 중국의 모든 왕조의 고민거리였던 황하의 치수 사업이 해결되거나 방기되면서 생겨나게 된 사회 문제와 이 시기에 중요한 사건이었던 손가감 위주 상주문 사건과 사고전서 사업, 건륭제 곁에 있던 화신(和珅)이 당시 조정과 관료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가 하는 점들을 섬세하게 풀어나갔다. 이미 벤저민 엘먼의 책에서 상세하게 정리되었듯이 17세기에는 『상서(尙書』 위작 같은 문헌고증이 의미있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18세기에는 문헌고증 대신 언어학적 방법론이 크게 부상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진전되었는가도 이 책의 2장에서 『시경』의 압운자(押韻字)가 협운(叶韻)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의 심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대흔
                                  전대흔

이 책은 18세기 청 왕조의 고증학이라는 큰 줄기를 따라가고 있지만 당시 청 사회의 모습을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울 내용이다. 청 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최대한 담고 싶었기 때문인지 다양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데 그래서 하나의 스토리를 찬찬히 쓰고 있다는 느낌은 주지 않지만 대신 지루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이 다양한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전대흔을 통해 하나로 묶고 있어서 일관되었다는 느낌도 있다. 이렇게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학술적 업적이 대단한 학자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각 개인이 고군분투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삶에는 영광도, 성공도 있었고 좌절도, 실패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의 사람을 이렇게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은 무척 경이롭다. 이들은 지금도 학술이나 저작 같은 성과를 통해 분석되고 평가되는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대부분 연구서에서는 그 사람의 심리상태나 성향이 복잡다단하고 우리처럼 현실에서 두려운 것도 있고 수치심도 가지는, ‘살아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아마 이 책을 읽게 되면 전대흔이든, 홍양길이든 또는 잠깐 언급되는 사람들이든 우리처럼 현실 속에서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고민하고 어떤 일에 기뻐하고 분노하며 누군가를 걱정해주고 애정을 가지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노시타 데쓰야는 주자학(朱子學) 연구로 유명한 학자이지만 학문 역정의 출발점은 청대의 고증학이고 이 책은 그가 7, 80년대에 썼던 논문들을 90년대에 정리한 단행본이다. 주자학 연구에서 보여준 사변성과는 달리 고증학 연구에서는 고음학에 대한 일련의 연구와 청대 학술의 동향, 청대 사회 상황 같은 안팎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이후 그의 관심사가 주자학, 또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경향으로 변모한 것이 이채롭기도 하고 결국 주자학 연구의 기틀이 청대 고증학의 텍스트 자세히 읽기라는 언어학적 접근에서 다져진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받고 있는, 다소 독특한 학문 이력을 가진 학자이다. 역자들은 우연한 계기로 접한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출판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저자가 작고한 뒤에 이전의 논문들을 엮어서 낸 『청대학술과 언어학(清代學術と言語学)』의 「서언(序言)」과 「후기(後記)」를 보게 되면서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서 병문안을 온 동료 학자들에게 초창기 연구 대상이었던 고증학 논문을 정리하고 싶다고 한 마지막 열의와 그 소망이 사후 동료 연구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저자의 열정과 저자에 대한 동료 연구자들의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최근에 고증학과 청대 학술 관련 책들이 국내에 계속 소개되고 있는데,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증학은 여전히 국내에서는 안개가 낀 듯 흐릿한 모습이어서 좀 더 선명하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이 국내에서 고증학에 관심을 가지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은주 서울대 기초교육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신광수 [관서악부]의 대중성과 계승양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있다. 역서로 『평양을 담다』, 『관서악부』, 『명청 산문 강의』(공역), 『중국산문사』(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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