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중국 북부 장악한 금나라 시조는 신라계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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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중국 북부 장악한 금나라 시조는 신라계 고려인"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1.22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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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신간]

■ 『전사들의 황금제국, 금나라: 금나라 통치전략 연구』 | 김인희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414쪽 | 2021.10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10세기 이후 중국에 건립된 정복왕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 발간한 『전사들의 황금제국, 금나라』는 거란을 이은 두 번째 연구결과물이다.

오늘날 중국은 한족(漢族) 중심 국가이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10세기 이후 북방 민족의 침입을 지속해서 받았다. 몽골족이 13세기에 세운 원나라는 중국을 포함해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원나라 이전에 중국 북부와 만주 일대를 호령한 민족은 여진족이었다. 아골타(阿骨打·아구다)는 여진 세력을 통합해 1115년 금나라를 건립했고, 거란족의 요나라를 제압했다.

 

뒤바뀐 조공

10세기 이전 동아시아는 한족 정권을 중심으로 천하질서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10세기 초 거란이 중원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통의 천하질서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거란의 뒤를 이어 일어난 금나라는 황하를 넘어 후아이하(淮河) 일대에 이르러 중원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정복왕조가 활약한 천 년은 동아시아에서 대변혁이 일어난 시기다.  

금나라는 남송과 신속(臣屬)관계를 확정하고, 세폐를 받았다. 이는 전통적인 봉공체계(封貢體系)의 기본을 뒤흔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전에는 중원의 한족 왕조가 사방의 이민족 정권을 책봉하고 조공을 받았다면, 이제는 이민족 정권이 한족 황제를 책봉하고 조공을 바치는 형태로 바뀌었다. 미국의 중국학자인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는 이러한 상황을 “뒤바뀐 조공” 또는 “역조공”이라 하였다.  

 

이적도 정통왕조가 될 수 있다.

금나라는 소흥화의 이후 남송과 신속관계를 맺고 세폐를 받았으며, 중원을 정복하고, 한족의 예악문화를 수용하여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정통왕조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여진족이었기 때문에 한족 왕조가 정통이라는 종족주의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금나라 이전 북방왕조들은 정통왕조가 되기 위해 한족 왕조의 조상인 황제(黃帝)를 훔쳐오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의 선택은 달랐다. 금나라 역사를 정리한 '금사'(金史)를 보면 국가 시조가 고려 출신이라는 내용이 있다. 금사는 "금 시조의 존함은 '함보'(函普)이며 고려에서 막 왔을 때 나이가 이미 60여 세였다"고 기록했다.

김인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한국과 중국 문헌을 고찰해 볼 때 "함보는 신라계 고려인"이라고 주장한다. 김 위원은 우선 동아시아에서 국가별로 함보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짚는다.

그는 "일본 학자들은 함보를 허구적 인물로 간주했지만, 한국은 함보가 실존했으며 신라 혹은 고려에서 왔다는 설을 지지했다"며 "중국에서는 함보의 실재 여부와 출신지를 두고 여러 견해가 제기됐으나, 전반적으로는 '고려에서 온 여진인'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한다.

김 위원은 우리나라 역사서 '고려사'와 '금사', 남송 역사가의 개인 저작인 '송막기문'과 '신록기'를 두루 검토해 금나라 시조의 이름과 가족 관계에 관한 기술이 조금씩 다르지만, 출신국은 모두 고려나 신라로 적었다고 강조한다.

이어 "함보 이야기는 말로 전승되다가 문자로 정착했으며, 제보자도 달랐다"며 "편찬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금 시조가 한반도에서 출발해 여진 완안부로 가서 여진 사회에 정착했다는 점은 유사하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출신지가 신라와 고려로 갈린 이유는 함보가 이동한 시기가 920∼930년 무렵이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이때는 918년 건국한 고려와 935년에 망한 신라가 공존한 시기다.

김 위원은 "함보라는 이름은 여진어 작명법과 맞지 않으며, 신라의 인칭 접미사 '보'를 쓴 것으로 보아 신라인임을 알 수 있다"며 "고려사에 따르면 함보는 현재 황해도 평산인 평주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당시 고려에 정복된 지역이었으므로 그는 신라계 고려인"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금나라 통치자들은 자신의 조상은 신라계 고려인 함보라 밝히고, “이적과 화하는 바뀔 수 있다(夷夏可變)”는 논리로 종족주의 정통론을 정면으로 돌파하였다. 금나라는 비(非)한족 정권도 정통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의 변화를 통해 당당히 정통왕조가 되었다. 

 

                                       금나라 지도와 금태조 아골타(출처-조선일보)

전사들의 황금제국,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1115년 대금(大金)을 건국한 이후, 금은 1124년 서하와 신속관계를 맺고, 1125년 거란을 멸망시키고, 1126년 고려와 신속 관계를 맺고, 1127년 북송을 멸망시켰다. 금나라의 전사들이 동아시아를 통일하는 데는 단지 12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금나라 전사들은 말(馬) 등을 집으로 삼아 전장을 종횡무진하였다. 태조 아골타가 영원히 녹슬지 않고 황금처럼 빛나기를 바랐던 금나라는 전사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황금제국이었다.    

책에서 여러 연구자들은 금나라 시조와 정통성 문제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대외 관계, 외교 전략, 군사력, 정치제도와 법률, 한족 관료 기용 양상, 농경, 종교 정책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금나라는 대제국을 경영하기 위한 관료제 구축이나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 종교 제도의 확립, 정통성의 확보 등에서 거란보다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으며, 한족화를 보류하고 끝까지 자기 민족의 특징을 유지했다. 

그러나 한족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행한 여진 습속의 강요와 한족에 대한 가혹한 차별은 금나라가 가지고 있는 명암의 한 단면이기도 하였다. 

윤영인 영산대 교수는 금나라 멸망 원인을 왕조 부패와 한족 문화 동화에서 찾는 기존 견해를 소개하고 “금나라가 몽골 흥기로 균열하기 시작한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전략적 실책이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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