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남은 사라진 시대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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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남은 사라진 시대의 흔적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11.08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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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70)_ 언어에 남은 사라진 시대의 흔적들


   
아명이 테무진인 칭기즈칸의 동생 중에 테무게가 있다. 이들의 아버지는 예수게이다. 칭기즈칸의 죽마고우는 자무카다. 이 이름들의 어미 –진, -게, -게이, -카는 모두 남성을 나타내는 접미사다. 그런가하면 달단족(韃靼族) 즉 타타르족의 경우는 누구라도 남자는 –타이, 여자면 –진이라고 부르는 게 관습이다. 그래서 알치 타타르 출신 남녀는 각각 알치타이, 알진이라고 부른다.

나는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리는 키르기스스탄을 좋아한다. 키르기스 민족의 영웅 마나스를 노래하는 마나스치의 푸른 눈동자를 보면 돌궐족 기원 설화의 색목(色目)이 바로 이들이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중국 측의 사서에 색종(塞種)이라고 기록된 푸른 눈의 유목민들이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 일대의 드넓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86년 전인 기원전 65년 제사(弟史)라는 이름의 오손국(烏孫國) 공주가 쿠차국(龜玆國) 왕 강빈(絳賓)과 혼인을 한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답변을 하기 전에 먼저 쿠차국 왕 강빈 때문에 생겨난 고사성어 ‘비려비마(非驢非馬)’부터 소개한다. 이 말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죽도 밥도 아니다”라는 우리말과 같다. 

조회 차 한나라를 방문한 구자국 왕 강빈은 나라 안에 한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여 궁전을 짓고, 장식이나 문양(紋樣), 제복 등을 본떴으며, 심지어는 매일 조회 때 종을 치거나 무릎 끓고 말하는 것까지 한나라 방식을 따랐다. 그렇지만 모방이 완전하지 못했던 까닭에 주변국 사람들이 이를 두고 아래와 같이 조롱했다.

“나귀가 나귀 같지 않고, 말이 말 같지 않으니, 구자국 왕은 이른바 노새와 같다(驢非驢, 馬非馬, 若龜玆王所謂騾也)”

오늘날과 같은 국경이 없었던 옛날, 키르기스스탄 나린 주 이식쿨 호수 일대의 초원과 산악, 강과 계곡은 온통 오손의 영역이었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무제의 명으로 13년 동안(기원전 139? 혹은 138?~126) 서역을 답사하고 돌아온 장건(張騫)이 흉노에 억류돼 있을 당시 오손 왕의 이름을 곤막(昆莫)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곤막은 왕의 칭호이며 실제 이름은 렵교미(獵驕靡)였다. 다른 기록에 대왕을 대곤미(大昆彌)라 한 점에 비추어 곤막과 곤미는 왕을 뜻하는 오손 말의 변이형으로 짐작된다. 오손국 곤막(왕) 렵교미(獵驕靡)의 부친 이름은 난두미(難兜靡)다. 이로 미루어 오손 남자 이름은 미(靡)를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곤막(렵교미)의 아버지(난두미)는 흉노 서쪽 변경의 작은 나라의 왕이었다. 그런데 흉노가 그를 공격하여 죽이고 곤막은 태어나자마자 들판에 버려졌다. 그러자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와 그 위를 날고, 늑대가 와서 어린 곤막에게 젖을 먹였다. 흉노선우가 그를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장년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게 하니 수차례 공을 세웠다. 선우는 그의 아버지의 백성을 다시 곤막에게 돌려주고 장기간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 선우가 죽자 곤막은 무리를 이끌고 먼 곳으로 옮겨가 독립하여 흉노에 조회하러 가지 않았다. 

 

재차 한무제의 명을 받고 오손과의 동맹 협상길에 나선 장건은 이식쿨 호수 남변에서 오손의 곤막(왕)을 접견하고 무제가 보낸 선물을 건넨다. 그리고 오손이 혼야왕의 옛 땅으로 이주한다면 한나라는 공주를 왕비로 보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오손은 분열 상태였고, 곤막도 나이가 들어 한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오손은 지리적으로 흉노와 가깝고 또 오랫동안 흉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흉노를 두려워했다. 

비록 동맹 협상은 결렬됐지만, 이후 한과 오손 두 나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오손과 한의 수교사실을 알게 된 흉노는 격노했고, 침공을 시도했다. 그러자 오손은 한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으뜸은 역시 여자를 매개로 한 혼인 동맹이다. 이때 오손은 결혼예물로 통 크게 한의 조정에 말 1,000마리를 바친다. 엄청난 숫자다. 漢 조정은 죽은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을 오손 곤막에게 시집보내며 시종 수백 명과 엄청난 하사품을 딸려 보냈다(기원전 105년).

그러자 흉노도 선우의 딸을 오손 곤막 렵교미에게 시집보내기로 한다. 이른바 화친(和親) 공주다. 이미 고령이었던 렵교미는 한족 여인을 우부인(右婦人)으로 흉노 출신 여인을 좌부인(左婦人)으로 삼았다. 우부인 세군은 말이 통하지 않고 습속이 딴판인 물 설고 낯선 이국에서 향수를 달래며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었다. 

나의 집안은 나를 하늘 저편으로 시집보내니 
멀리 이국땅 오손왕에게 의탁하네 
궁려(窮廬, 게르ger의 音借字)로 방을 삼고 전(旃, 모직 천)으로 담을 둘러 
육(肉)으로 음식을 삼고 유즙(乳汁, 마유주인 쿠미스)으로 물을 삼네 
거상토(居常土, 고향땅) 생각하면 가슴속에 괴로움만 깊어가네 
원하노니 황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렵교미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며 한나라에서 시집 온 세군을 손자 군수미에게 주었다. 자신이 무슨 물건인 냥 한 집안의 조부로부터 손자에게로 대물림된다는 사실에 기가 막힌 세군은 무제(武帝)에게 서한을 보내 하소연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제의 답신은 냉정했다. “그 나라의 관습을 따르라. 오손과 함께 호(胡, 흉노)를 멸할 날을 기다리고 있으라.” 부득이 세군은 군수미의 아내가 돼 그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리고 44세에 유명을 달리한다. 쿠차왕 강빈과 결혼한 사람이 바로 오손왕 군수미와 한족 여인 유세군 소생의 딸이다. 

역사는 이러하다. 개인의 운명은 대개 집단의 대의와 명분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희생을 강요당하는 쪽에서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쩌려면 더욱 불행해진다. 너무나 가혹한 논리인가?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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