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 차탈회윅, 이 도시들은 왜, 어떻게 종말을 맞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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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 차탈회윅, 이 도시들은 왜, 어떻게 종말을 맞았을까?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10.18 0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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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 애널리 뉴위츠 지음 |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356쪽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 과밀화로 인한 장점(인프라와 문화 등)과 단점(환경, 주거, 빈부 문제 등)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과 급격한 기후변화 등으로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요즘, 그 집약체인 도시 문제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이 책은 그 반면교사로서 과거 크게 번성했으나 종말을 맞은 도시들의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탐사 르포르타주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는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는 결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들은 왜, 어떻게 종말을 맞았을까? 우리는 그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곤 한다. 도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사람들이 도시인으로서 살았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해야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만드는 선택을 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왜 우리 조상들은 탁 트인 대지의 자유를 버리고 냄새 나며 갑갑한, 인간의 배설물과 끝없는 정치적 드라마로 가득 찬 곳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어떤 직관과 판단에 이끌려 정착하고 농사짓게 됐을까? 어떻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가까이 모여 함께 사는 데 의견을 맞추어 공공의 장소와 자원을 건설했을까?

저자 뉴위츠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버려진 도시들의 흔적을 수 년간 찾아다니고 최신 고고학 연구를 섭렵했으며 관련 연구자들을 취재했다. 사람들이 왜 떠나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왜 왔는지, 머무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건설한 고향을 버렸을 때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원서와 저자 애널리 뉴위츠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의 역사는 사뭇 다르다. 이 책에서 그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수백 년에 걸쳐 끊임없는 변화를 거쳤다. 도시의 배치는 시민이 달라지면서 변했다. 가깝고 먼 여러 곳에서 이 도시들로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맛있는 음식이나 전문화된 일거리에서부터 여흥과 정치권력을 얻을 기회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이 이주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이 도시 주민의 3분의 2를 넘는 경우도 있었다. 지도자들은 둔덕과 저택에서 통치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도시를 유지한 것은 농사를 짓고 가게를 운영하고 도로를 건설한 보통의 노동자들이었다.

도시가 커지면서 상층 계급은 사람들을 계약 하인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예화하거나 그들을 농노로 전환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조직화했다. 도시를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노동력을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강제하기도 하고 유인하기도 했다. 보통은 두 가지를 병행했다. 그리고 도시가 정치적으로, 환경적으로 휘청거릴 때는 노동자들이 누구보다도 더 압박을 받았다. 그들은 남아서 뒤처리를 하든지 다른 어느 곳에 가서 새출발을 하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도시의 인구 감소는, 그 원인과 결과는 다르지만,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만든 거대한 기반시설을 관리하는 골치 아픈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인간 자체를 관리하는 일은 더욱 큰 문제였다. 도시는 인간 노동력을 실체로서 구현한 것이며, 담장과 저수지와 광장의 파괴에서 그 대중의 흩어짐을 읽어낼 수 있다.

 

▶ 이 책에서 탐구하는 첫 번째 도시 차탈회윅은 대략 9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건설됐다. 수십만 년 동안 유목 생활을 하던 인류는 이즈음 농경 생활에 들어갔다. 수수께끼에 싸인 그 유적은 지금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낮은 두 구릉 아래 묻혀 있다. 터키 농민들은 구릉지 아래에 실제 도시가 묻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정교한 공예품들이 일상적으로 쟁기에 걸려 나왔고, 한 언덕 위에는 성벽 일부가 여전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략 천 년 동안 그 인구는 5천 명에서 2만 명 사이로, 당시로서는 대도시였을 것이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은 2백 명쯤이 사는 마을보다 더 큰 정착지를 본 적이 없었다. 차탈회윅은 흙과 이엉으로 건설됐는데,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길게 뻗쳐 있었다. 집 내부로 들어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옥상 출입구를 통해야 했다. 주민들이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조각상과 그림, 상징적으로 장식된 두개골은 많이 남겼다.

서기전 제6천년기 중반의 어느 시기에 차탈회윅 사람들은 복잡하고 비좁은 보도를 버리고 떠났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지중해 동안 지역에 가뭄이 닥쳤고, 사회 구조상 문제가 생겼으며, 아마도 도시의 구획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떠난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찾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마을 생활 또는 유목 생활로 돌아갔다. 그들은 단순히 차탈회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도시 생활 자체를 거부한 듯하다.

 

▶ 다음에 탐구할 도시는 잊힌 곳이 아니다. 그 정확한 위치가 한동안 오리무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햇살 좋은 지중해 연안의 로마 시대 관광지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산 분출 뒤 화산재 속에 깊숙이 묻혔다. 목격자들과 역사가들이 이 도시의 끔찍한 파멸을 기록했지만, 18세기 이후에야 체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폼페이가 버려진 이유는 아주 간단한 듯하다. 섭씨 250도의 화쇄암 폭풍이 마을을 덮쳐 모두를 쓸어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는 않다. 폼페이는 과거에도 자연재해를 겪었다. 베수비오 분출 십여 년 전 지진이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당했지만 딛고 일어섰다. 폼페이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화산이 분출하던 날 아침에 주민의 절반 이상이 대피했다. 그들은 치명적인 폭발 몇 시간 전 산에서 연기가 나고 진동이 시작될 때 도망쳤다. 이 도시의 종말에 관한 흔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미신과 두려움 때문에 파묻힌 도시를 꺼려, 한때 살던 곳에서 금세 발길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사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다.

고고학자들은 최근, 제국이 난민들을 나폴리 같은 인근 해안 마을들로 이주시키고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시역을 넓히고 도로를 늘렸다는 새로운 증거를 찾아냈다. 많은 귀족들이 폭발로 죽으면서 재산을 남겼기 때문에 정부는 해방 노예들이 주인의 재산을 물려받도록 허락했다. 이 해방 자유민들은 독자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폼페이는 사라졌지만 로마의 도시 생활은 여전히 번성했다.

▶ 앙코르는 폼페이가 단 하루에 겪은 재난을 아주 천천히 당했다. 이 도시는 한 번의 화산 분출 대신 백 년 동안 이어진 기후 위기의 연타를 맞았다. 걸린 시간은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홍수 같은 환경 재난으로 인해 이 도시는 주민들 대다수가 살 수 없는 곳이 됐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은 자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앙코르의 왕들은 더 이상 일꾼 부대를 동원해 도시의 생명선인 수로망을 재정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앙코르의 도시 계획에서 가장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은 저수지 시설이 아니라 강제노동에 의존한 엄격한 사회적 위계였던 듯하다.

19세기에 앙리 무오라는 프랑스 탐험가가 ‘사라진 도시’ 앙코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의 다른 유럽인 여행자들이 앙코르와트 사원 구내에 아직도 승려들이 살고 있다고 확인해주었지만, 무오는 인기 있는 여행기를 써서 자신이 처음으로 이 사라진 문명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수백 년 동안 이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고대 이집트 유적에 필적할 만한 멋진 유적들이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영원히 유지되기 십상인 신화였다. 모험담에 목말랐던 서유럽인들은 형편없이 무너진 도시의 사원과 불거진 나무뿌리로 인해 쪼개진 담장의 돌들 사진을 보고 무오의 말에 홀딱 빠졌다. 애당초 앙코르를 사라진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미디어의 조작 때문이었다. 모든 증거는 그 반대였다.

▶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또 다른 거대 중세 도시가 확대됐다가 축소됐고, 운명의 역전은 그 풍광에 영원히 새겨졌다. 카호키아는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미시시피 강변 저지의 작은 마을이 성장해 3만 명이 넘는 팽창하는 대도시가 됐다. 그 영역은 강 양쪽에 걸쳐 있었다. 카호키아인들은 흙으로 쌓은 높다란 피라미드와 다락 통로를 건설했다. 집과 농경지가 펼쳐진 사이사이에 제례 시설들이 있었고, 여기서 축제가 열려 남부 전역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9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카호키아는 위스콘신에서 루이지애나에 이르는 미시시피강 유역의 도시와 마을들을 묶어준 사회 운동이자 영적 운동이었던 ‘미시시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스트세인트루이스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수십 개의 집 모형이 일시에 불탄 현장을 발견했다. 벽들은 불길에 휩싸이고 옥수수, 도예품, 아름답게 만들어진 화살촉 등 봉헌물들도 불에 탔다. 아마도 카호키아인들은 주변의 모든 건조물들에도 정해진 수명이 있다고 보고 언제나 전체 도시가 일시에 폐쇄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카호키아는 종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으며, 둔덕을 엄청난 높이로 쌓아 올릴 때에 이미 그 운명은 봉인됐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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