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의 등장과 성공 조건…자생적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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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 등장과 성공 조건…자생적 질서
  •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경제철학
  • 승인 2021.09.2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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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국 칼럼]

현대사회는 열린 거대한 사회다. 구성원들이 제각각 추구하는 목적이 다양하고 이질적이라는 의미에서 다원적이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관계라는 의미에서 인간관계가 추상적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 협력하는 익명의 비대면 사회다. 모두가 신분상 차별이 없는 사회다. 개인들이 자신의 지식에 따라 스스로 정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 

본디 인류가 살았던 사회는 닫힌 소규모 사회였다. 닫힌 사회의 구성원들은 동질적이고 얼굴을 마주하는 사회였다. 끼리끼리 나눔, 연대감, 우정. 애정, 그룹 애착심과 그룹 의존심에 의해서 통합된 사회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과 배타심이 지배하는 그래서 닫힌 사회다. 이런 사회의 대표적인 것이 사회생물학의 인식대상인 수렵-채취 군단 또는 종족사회, 유목사회, 농경사회 등이다. 

주목할 것은 열린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시장의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는 것, 열린사회의 간판은 그래서 자생적 질서라는 것이 이 글의 핵심주제다. 이로써 그동안 불완전했던 열린사회론의 결함이 시정될 것이다. 

우선 질서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흥미롭다. 다른 사람의 협조 없이 아무도 혼자 살 수가 없다. 그런 협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계획과 행동이 타인들의 그것과 서로 조정이 되어야 한다. 개인은 제각각 모든 타인이 어떤 행위를 계획하고 있는가에 대한 예상을 토대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는 이유다. 행동 조정 문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각각 지닌 상이한 ‘지식의 조정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개인들의 행동은 그들 각자가 지닌 지식을 통해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제각각 다른 모든 사람의 계획과 행동을 예상하고 자신의 행위를 결정한다면, 그들의 행위가 서로 상충하지 않고 상호 조화롭게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그들의 행동이 서로 조정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그런 예상이 적중해야 한다. 예상의 적중 가능성이 크든 작든 그것이 적중해야만 사람들이 세운 계획과 행동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적중 가능성을 ‘질서(order)’라고 부른다. 

질서의 핵심은 사람들이 타인들의 계획과 행동에 대하여 얼마나 예상·기대할 수 있는가에 좌우된다. 타인들의 행동에 대한 기대의 형성을 위해서는 개인은 그들이 제각각 지닌 지식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피자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자에 대한 수요자의 선호, 원하는 가격, 원하는 시점 등에 관한 지식은 물론 밀가루를 반죽하는 기술, 밀을 제분하는 기술 그리고 밀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기술 등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지식은 시간과 장소에 관한 특수한 지식으로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제각각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피자 굽는 지식은 피자 생산자의 머릿속에, 제분 관련 지식은 제분업자의 머릿속에, 밀 재배 지식은 농민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이와 같이 지식이 사회의 도처에 분산되어 있다. 암묵적·초의식적 성격의 지식이 대부분인 그런 모든 지식을 어느 한 정신이 갖는 것은 불가하다. 인간 이성은 구조적으로 무지한 것은 그래서이다. 

따라서 열린사회의 경제 문제는 ‘지식 문제(knowledge problem)’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새뮤얼슨-맨큐 전통의 주류경제학에서처럼 소규모의 닫힌 사회였던 오이코스 노미아(가계경영)의 ‘자원배분 문제(allocation problem)’를 거대한 열린사회의 문제라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 대신에 거대한 열린사회의 경제문제는 각처에 흩어져 있는 지식이 어떻게 소통되어 사회적으로 그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가의 문제다. 

예컨대, 성공적인 피자 공급을 위해서는 필요한 지식 전체를 수집·가공하여 그에게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그것이 시장질서의 가격을 통한 소통체계다. 가격은 시장참여자들 각자가 지닌 지식을 전달하여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즉 각처에 분산되어 존재하는 지식을 수집·가공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주류경제학은 완전한 지식을 전제로 하는 선택의 논리 때문에 사회과학의 중요한 연구 분야인 소통이론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가격은 비언어적(nonlinguistic) 소통 수단이라는 점이다. 이는 시장에서만 가능한 소통 방법이다. 

지식 소통과 관련된 시장 기능은 즉 새로운 지식의 발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경쟁을 통해서 발견된 새로운 지식은 가격 변화를 통해 시장 전체로 전달된다. 시장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이 발굴되기 때문에 시장은 균형이 아니라 늘 과정이다. 경이롭게도 우리가 귀, 눈으로는 물론 인지능력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범세계적인 거시우주로까지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은 가격의 비언어적 소통 역할 때문이다. 서울의 귤 수요자는 남미의 귤 생산업자와 가격을 통해서 양측의 의견과 생각 선호를 서로 소통한다. 요컨대, 열린사회가 가능한 이유는 시장과 가격구조의 존재 때문이다. 시장의 덕목은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아니라 지식 소통의 탁월성이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큰 규모의 지식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모든 발전된 문명화의 징표다. 

시장이 성공적인 조정 메커니즘으로서 작동하려면 도덕·법적 조건이 필요하다 주목할 것은 그런 조건으로서 행동 규칙의 성격이다. 그들은 보편적·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열린 거대한 그래서 복잡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행위 지침을 일일이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행동규칙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행동지침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추상적 행동규칙인 것이다. 예를 들면, 인격과 소유 존중, 자발적 교환, 자기 책임, 법 앞의 평등과 같은 도덕적 기본원칙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 영역을 형성한다. 그런 규칙 내에서 각 개인은 자신만의 무한한 구체적 목적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들이 지키는 행동규칙은 반드시 글(성문화)이나 언어로 표현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의식적일 필요도 없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암묵·초의식적이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그런 준칙들을 지킨다. 시장이 국가계획과 간섭이 없다고 해도 자생적으로 질서가 형성되는 이유는 지식을 전달하는 가격과 행동규칙의 존재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소규모의 닫힌 사회가 열린사회로 전환되었는가의 문제다. 언어, 화폐, 사유재산, 도덕, 종교규칙, 관습법 등의 제도를 만들어 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이성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토머스 홉스 이래 유행했던 사회계약론은 틀렸다. 그런 제도는 ‘문화적 진화’의 결과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규칙들이 새로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관습적으로 지켜온 규칙들을 위반해야 한다. 이런 위반이 혁신이다. 새로운 행동방식은 테스트를 거쳐 성공하면 그런 행동방식을 의식·무의식적으로 모방한다. 모방하는 사람 수가 증가하여 행동규칙을 사용하는 사람 수가 증가하면 타인들로부터 그런 유사한 행동을 기대하게 된다. 규칙들이 사회제도로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런 제도가 선택된 이유는 인간들에게 편익을, 삶의 개선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런 편익은 사람들이 예지적 지식이 아닌 관찰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특정한 규칙을 지키는 인간 그룹이 번창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모방한 것이다. 그들은 그런 행동규칙이 어떻게, 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지 못하고 또한 알 필요도 없다.

요컨대, 칼 포퍼의 ‘세계 3(world 3)’에 해당하는 자생적 질서는 열린사회의 간판이고, 이는 본능과 이성의 너머에서 형성되는 질서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경제철학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이다.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과 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사)자유주의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하이에크, 자유의 길』, 『국가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국가철학』, 『자유주의의 도덕관과 법사상』,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의 법과 질서』, 『하이에크 자유주의 사상 연구』, 『경제사상사 여행』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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