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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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21.09.06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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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치하 독일에서 ⑴ 인구가 줄었다 ⑵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다 ⑶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⑷ 수백만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네 가지 진술은 모두 사실에 부합하는 진실이다. 그렇지만 네 진술이 담고 있는 진실의 무게 또는 ‘진리값’은 다르다. 이것은 어떤 진술이나 주장을 단순히 진실-거짓의 이분법으로 평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는 진술조차도 그것의 진리값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각각의 진술은 언어매개적, 또는 언어수행적 힘을 발생시킨다.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단순히 ‘죽었다’고 진술하는 것은 그가 ‘자연발생적으로’, 예를 들어 다른 인간의 폭력적 행위에 의해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함의를 동반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진술조차도 나치 치하에서 그들의 죽음이 조직적인 잔인한 학살 작전의 결과였다는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오직 진술 ⑷만이 실제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고 진실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다른 진술들은 사실을 전달하기는 하지만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한다. 특히 이런 진술들은 가해자들을 비호하고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그러므로 ‘가짜 뉴스’다.

흔히 ‘진실한’ 진술은 주관적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한다고 말하지만, 위의 네 진술 가운데 ⑷는 가장 가치평가적이며 오히려 그것에 의해 객관적 사실을 더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것은 주관적 가치 평가와 객관적 사실 서술이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복합된 것임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그는 용감했다’ 같은 진술에서 보듯, 특히 사회적인 일들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대부분 가치 판단과 사실 서술의 구별할 수 없는 복합체이다. 그리고 ⑵의 ‘죽었다’는 진술은 겉보기에 가치판단을 배제한 ‘중립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죽음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해명을 포기하거나 회피한다는 판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실’이 항상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우 동일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상이한 (가치판단과 복합된) 사실 진술들이 경쟁하게 된다. 그리고 ‘공론장’에서의 경쟁에서는 사실에 부합하는 ‘진실한’ 진술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공론장이라는 영역에도 정치권력, 사회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그것에 의해 그것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진술이 ‘진실’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수백만이 죽었다’는 진술에 이익을 결탁하고 있는 세력은 ‘학살당했다’는 진술에 대해 사실 진술이 아니라 가치 판단이라는 비난으로 진리값을 부정한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를 구축(驅逐)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언론중재법에 “손해액의 5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손해배상액을 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개정안’을 놓고 논란이 심하다. ‘언론보도의 피해를 구제하여 언론의 자유와 공적(公的) 책임을 조화함’을 목적으로 하는 그 법의 개정을 반대하는 진영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악법이라고 목청을 높이면서도 언론의 ‘책임’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언론 자유의 주장은 언론이 ‘자유롭게’ 보도하는 의도하지 않은 또는 의도적인 가짜뉴스에 의해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권익 보호 문제에 관해서도 비슷한 정도의 변론을 동반해야 설득력을 갖는다.

‘죽었다’는 사실 진술로 ‘학살당했다’는 진실을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매체들, 읽다 보면 보도가 아니라 악담과 저주라고 깨닫게 되는 기사들을 싣고 있는 매체들, 그럼에도 언론 대자본이나 대자본 언론의 매체로서 자본의 힘에 얹혀 공론장을 지배하며 가짜 뉴스를 ‘여과 증폭’하는 매체들, ‘기레기’라는 조롱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매체들, 그래서 사회성원들 사이의 이익과 갈등을 조정하고 그것에 의해 사회 통합을 이끌어내는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언론’이라는 존재이유를 배반하고 사회 갈등을 증폭하며 ‘사회의 흉기(凶器)’가 된 매체들이 언론 자유를 외치고,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익을 노려 그것을 부추기고 가담하는 세력들을 보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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