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점령군? 이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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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군, 점령군? 이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쓸 때다
  • 이계형 국민대학교·한국사
  • 승인 2021.08.0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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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얼마 전 여당의 유력 정치인이 해방 정국 당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을 ‘점령군’이라 발언했다가 야당과 보수 인사들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일컬었던 ‘주사파’와 결이 같다고도 했다. 해묵은 논쟁 같지만,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우리의 현대사를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역사 인식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먼저 여당 정치인의 발언을 두둔하거나 옹호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유력 정치인의 발언 요지는 이렇다. 그가 경북 안동의 이육사 따님과의 대화 중에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았나,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 친일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여전히 남아 있다”라고 발언한 내용 중에서 미군을 ‘미 점령군’이라 표현한 것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 독립운동가 후손과의 대화라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한데 말이다. 

그렇다면, 사건의 발단이 된 1945년 8월 해방 정국 당시로 되돌아가자.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이 있었다. 첫 마디가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라고 시작한다. 내용에는 결코 한마디도 ‘항복’을 한다든지, ‘패전’을 했다든지 잘못을 ‘시인’한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공동선언’ 즉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하였으니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해방을 맞아 다시금 이 땅의 주인이 되었음에도 이를 실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8월 16일은 전연 달랐다. 수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해방군’을 맞으러 서울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 줄 ‘해방군’을 바랐던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축 해방!”, “WELCOME”, “조선독립만세!”, “민주정권수립” 등의 피켓, 플래카드 등이 들려 있었다. 

이러한 기쁨도 잠시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군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다시금 “WELCOME THE ALLIED FORCES!”(연합군을 환영하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그들을 환영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의 통치는 우리의 의도와는 전연 딴판으로 돌아갔다. 미군정에 의해 일제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으려던 건국준비위원회는 해체되었고, 일제강점기 27년 동안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예우와 친일파 처벌이라는 민족정기를 바로 잡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는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공포된 ‘포고령 제1호’에 따른 것이었다. 그 가운데 “일본 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occupy)-밑줄·영문 필자)”는 내용이 핵심이다. 미군정은 이를 근거로 남한 내의 어떠한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한반도 남쪽을 사실상 통치하였다. 그렇다면 미군은 사실상 ‘점령군’인 것이다. 점령군(Occupation Troops)을 “지역 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항복 또는 휴전조항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하여 점령한 적 영토 내에서 실질적인 통제를 하는 군대”라고 정의하는 사전적 의미를 봐서도 그렇다.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하면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세력은 ‘반미’라고 해석한다. 미군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립하기 위한 5·10 총선거와 헌법 제정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했고, 맥아더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추앙해야 한다고 한다. 즉 친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되짚어보자.

조선 시대의 외교 정책 가운데 비판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사대주의이다. 중국의 명나라를 섬기는 대신에 평화를 보장받았다. 이를 위해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고 왕위 계승까지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 결과 사실상 조선은 명나라에 ‘종속’되었고 지금까지도 중국은 그러한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명, 청 교체기에 중립 외교를 펼쳤고 그의 가장 큰 업적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는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등의 국내 문제를 청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다 내정간섭을 당해야 했고 급기야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결국에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오늘날 미·중 간의 신냉전 체제가 도래하면서 구한말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구한말에 친미파·친러파·친일파 등으로 국론이 분열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친미, 친중만을 고집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예전에 나약하여 우리의 주권을 우리가 스스로가 지키지 못하던 나라가 아니다. 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UNCTAD)가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협상국이 되었다. 세계는 대한민국의 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쓸 때이다. 미군이 ‘점령군’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인다. 


이계형 국민대학교·한국사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문학박사)를 받았다. 국민대·중앙대·가천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친일진상규명위원회·대한민국역사박물관건립추진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국민대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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