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름 들리는 대로 듣고 말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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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 들리는 대로 듣고 말할 뿐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6.0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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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53)_ 낯선 이름 들리는 대로 듣고 말할 뿐 

 

“전갈의 독보다 더 독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서양 속담에 “Curiosity kills a cat”이라고 했는바, 지나친 호기심은 스스로 즐겁지 않는 한 이렇다 할 실속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끈질긴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귀화성(歸化姓)에 대해 말하려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성계와 함께 어울려 지낸 죽마고우로 조선이라는 신왕조 개창에 큰 도움을 준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이라는 장수가 여진족 출신이라는 건 다들 안다. 李氏라는 성을 사성(賜姓)받고 오늘날의 함경북도 북청군에 해당하는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의 시조가 되기 전 그의 여진족 본명은 퉁두란(佟豆蘭)으로 성씨(姓氏)가 퉁(佟, 동)이고, 이름은 두란(쿠란투란티무르, 古倫豆蘭帖木兒, 고륜두란첩목아)이다. 

『高麗史』에 따르면 아들 덕에 이아원(李雅遠)으로 개명한 이지란의 부친은 원(元)나라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였다. 금패천호란 千戶를 관장하는 금나라 황제의 후예(완안씨)를 일컫는다. 아라부카라는 이름의 의미는 ‘큰 늑대’다. 기황후의 심복이었던 환관의 이름 朴不花 역시 ‘늑대’라는 뜻이다.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와 소르칵타니 부인 사이의 막내아들 보르지긴 아리크부카(孛兒只斤 阿里克布克 패아지근 아리극포극) 역시 (푸른 눈 여우 씨족의) 큰 늑대이다. 그는 형제지간인 쿠빌라이와 몽골 제국 칸의 지위를 놓고 다툰 인물이다. 그의 또 다른 형제는 몽케, 훌라구 등이 있다.

                                                  이지란 초상화 / 조선 태조 이성계

살수대첩에서 당나라 군사들을 수몰시킨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복성(複姓) 을지(乙支)는 서역국가 구자(龜玆)의 지배집단 성씨인 울지(蔚遲)의 이형태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얼마 전 거론했다.

                                 몽골제국 제2대 칸 오고타이 / 여진족의 나라 금의 건국주 완안 아골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제국 제2대 칸의 이름 오고타이(窩闊台 와활태, Ögödei)와 그가 멸망시킨 여진족의 나라 金國의 시조명 아골타(阿骨打, 兀古達 올고달로도 표기), 그리고 후한 말 요동의 군벌 공손탁(公孫度)의 조카딸과 결혼함으로써 두 집단 간 혼인동맹을 맺은 사나이이자 백제 건국시조로 추숭(追崇)되는 인물의 이름 위구태(尉仇台)가 실제로는 하나의 이름에 대한 다양한 이표기이다. 이 이름의 발음과 관련하여 페르시아인들은 우그타이(Ūgtāy) 또는 우카다이(Ūkaday), 이탈리아인들은 옥코다이(Occodai)라고 서로 닮은 듯 다르게, 다른 듯 흡사하게 소리의 줄타기를 한다.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런 인물들의 이름은 대개 비슷한 음가의 다른 한자어로 적혀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어딘가 달라도 다르다. 비교 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유사성이라는 단서에 의거해 양자를 닮은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사람마다 인지능력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별’이라는 뜻을 지닌 라다크 남자의 이름 스카르마(Skarma)를 듣고 누군가는 까르마로, 어떤 사람은 스카르마로, 또 다른 이는 스까르마로 듣는다. 이때 어느 누구도 잘못 들었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은 다만 한 이름의 이형태 혹은 변이형이다. 그리고 이렇게 미세한(?) 차이는 원형에 대한 오해를 낳지 않는다. ‘모두’라는 뜻으로 강릉 사람들은 ‘마커’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마카, 마캐, 마쿠 등으로 사람마다 달리 말하고 있다.

솔직하고 용기 있는 도전의 여성 래퍼 제시(Jessi)의 본명이 호현주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리고 뒤이어 ‘우리나라 성씨에 扈氏가 있었던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알아보니 본관이 新平인 호씨였다. 신평 호씨의 도시조(都始祖)는 호의(扈義) 또는 호원보(扈元甫)라고 하는 인물로 고려 창업의 원종공신 즉 개국공신이다. 그의 장남 호철(扈哲)의 17세손 호종국(扈從國)이 신평 호씨(新平 扈氏), 次子 은열(殷悅)이 보안 호씨(保安 扈氏), 三男 흥인(興仁)이 나주 호씨(羅州 扈氏)로 분관하였다고 한다. 사람 수는 각각 2,150명, 24명, 133명이라니 분명 희성이다. 하긴 延氏도 희성이긴 하다. 

그런데 신평 호씨 시조인 호의의 혈통은 漢族일까, 아니면 韓族일까? 혹은 유목민일까? 필자의 姓인 延氏의 기원을 탁발선비의 부족명 가지연(可地延)에서 찾아볼 수 있듯, 扈씨의 연원 또한 그런 방향에서 추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재미는 없겠지만, 관점을 달리하는 학자들의 다채로운 사변과 자기주장의 집요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다양한 결말을 보여준다는 것을 엿볼 수 있으리라 본다. 학문을 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성은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탄력적 수용성이지 독단적 완고함이 아니다. 

호씨 근원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견해 중 가장 우세한 것은 사성론(姒姓論: ‘姒’ 손윗동서 사)으로 <풍속통 风俗通>, <좌전 左传>, <한서 汉书>등의 기록에 의존한다. 夏는 국명이기 이전에 부락의 이름이었다. 요순시절 곤(鯤)의 아들 禹가 치수에 공을 세워 순임금 사후 제위를 물려받고, 이어서 우의 아들 啓가 대를 이어 하왕조를 건립하였다. 

당시 원시 푸날루아 사회(모계사회)에 속했던 하나라 禹임금의 배다른 아들 호(扈)가 일시 왕위를 계승하여 자칭 하후호(夏后扈)라 하였다. 姒姓은 夏왕조 시대 姜(강), 姬(희), 姚(요), 贏(영), 妘(운), 嬀(규), 妊(임)과 더불어 上古 8大姓 가운데 하나다. 같은 성은 같은 모계의 혈연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상고 팔대성 모두 계집녀 부수(女)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 성씨가 다른 조모계 혹은 모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씨족의 무리임을 나타낸다.

8이라는 숫자가 동전 두 개가 위아래로 붙어 있는 형상이라서인가 중국인들은 여덟팔자를 좋아한다. 백제에도 대성팔족(大姓八族)이 있었다. 수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백제에는 왕성인 부여씨(扶餘氏)와 더불어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정씨(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진씨(眞氏), 백씨(苩氏)라는 8대 성씨가 상류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사에는 정씨 대신 묘씨(苗氏)가 나오고, 당나라 인문지리지인 괄지지(括地志)에는 수씨(首氏)가 등장한다. 한때 백제부흥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종당에는 당나라 조정을 섬긴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본래 王姓인 부여씨인데 그의 선조가 흑치국을 다스렸기에 국명으로 새로 성을 삼았다.

호씨의 기원에 대해 선비족의 3字姓인 호지간씨(扈地干氏) 기원설도 있다. 본래의 호지간이 선비의 신원황제 탁발력미 치세 중에 單姓인 扈로 改姓하였다는 것이다. 滿洲族 기원설은 호씨의 근원에 대한 근거 史籍으로 清朝의 <통지 通志>, <씨족략 氏族略>, <만주팔기성 满洲八旗姓> 등의 기록을 제시한다.

                         여자공양인도(둔황 98굴 동편벽) / 둔황 막고굴

수년 전 국립박물관 특별전시 실크로드전을 보러 갔었다. 둔황 막고굴의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벽화 여자공양인도(둔황 98굴 동편벽) 속 여성의 신분이 신부소낭자 색씨 적씨(新婦小娘子 索氏 翟氏)라 기록된 걸 보고 이들 성씨가 과연 漢族의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의구심은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이 둘 중 지역과 시기가 달라짐에 따라 사카 내지 스키타이 등으로 불리는 索氏는 소(牛) 유목민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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