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강할수록 폭력적이고 적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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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강할수록 폭력적이고 적대적이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5.10 0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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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국가 대한민국: 부족주의의 노예가 된 정치 |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328쪽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부족주의는 경험적으로 어떤 장소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부족주의는 내로남불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정치적 이념이다. 나름의 노선과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부족이나 패거리의 이익이다. 부족주의는 부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익 투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부족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선한 권력’이라고 착각한다. 개혁을 위해서는 내로남불과 유체이탈은 불가피하며 때로는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부족주의에는 이런 집단 정서를 뒷받침하는 열성 지지자들의 강철 같은 신념과 행동이 도사리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에 대한 유불리를 따져서 판단하는 부족주의의 전사가 되었다. 모든 기준은 오직 자기 부족의 이해관계다. 자기 부족에 유리하면 극찬하고, 불리하면 탄압한다. 무조건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이 진보임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부족의, 부족에 의한, 부족을 위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밥그릇 공동체’에 가까운 ‘가짜 진보’다.

이 책은 문재인 정권의 독선과 오만과 위선과 무능을 비판한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이어 세 번째의 진보 정권인 문재인 정권의 사전에는 성찰이 없다. 성찰이 없는 진보는 진보일 수 없다. 모든 잘못된 것은 보수의 탓이라는 적반하장(賊反荷杖)과 후안무치(厚顔無恥)로 일관한다. 문재인 정권은 기껏해야 ‘보수 응징’ 세력이지 진보가 아니다. 적폐 청산이라는 문재인 정권의 대표 슬로건이 말해주듯이, 보수 응징 이외에 이렇다 할 진보의 비전이 없다. 문재인 정권은 자기들 잘나서 정권을 잡은 것처럼 ‘싸가지 없는 진보’의 길로만 나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부족주의는 이념의 좌우를 초월하는 최상위 개념이다. 부족주의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기 때문에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국이 노골적인 부족국가로 퇴행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미국 예일대학 로스쿨 교수 에이미 추아는 “부족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집단이 헌신하는 목표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서 현실을 대대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시시대의 부족사회에서는 연고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부족이 연고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들과의 전쟁이나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필요했다. 세상이 발달하면서 부족사회나 부족국가는 사라졌지만, 그런 ‘부족 본능’은 살아남았다.

한국의 부족주의에 좌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해관계 충실도 수준이다. 보수가 비교적 이해관계에 더 민감하다. 보수 부족주의의 전성시대는 박근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친박’의 정도를 따지며 온갖 유형의 부족이 난무했던 2015년이다. 결국 보수는 제 무덤을 팠고,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진보는 좀 다른 유형인 우리 편과 반대편의 경계를 선명하게 나누는 선악 이분법에 빠져들었다. 문재인 정권의 주체이자 핵심 세력은 민주화 운동가들이다. 이들은 국정 운영을 반독재 투쟁하듯이 하면서 ‘운동권 부족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때는 바야흐로 진보 부족주의의 전성시대다. 다만 보수 부족주의의 전성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명분과 당위의 포장을 더 앞세우고 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부족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부족주의는 역지사지 능력을 죽여버린다. 오직 자신의 부족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만을 따져서 사납게 반응할 뿐이다. 이들에게 나름의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들은 선(善)이요 정의(正義)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집단적 자기기만이다. 사실 부족주의라고 했지만, 진짜 부족주의도 아니다. 이익공동체 성격이 두드러져 상황이 바뀌면 분열과 배신이 대규모로 일어날 기회주의적 부족주의다. 지금 이 순간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일시적 부족주의다.

데카르트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고 말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변명이 늘면서 사실을 왜곡하게 되고,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이 코로나 백신 접종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권의 공방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K방역 자화자찬 마인드에 중독된 탓인지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은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고 빡빡 우겼다. 자신들을 둘러싼 적의 실체와 규모를 과장하면서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큰일 난다”며 ‘약자 코스프레’와 ‘완벽주의자 코스프레’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들은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크게, 계속 밀린다는 이상한 이론을 앞세워 무오류의 존재를 자처했다. 자신들을 무오류의 존재로 간주하거나 우기는 독선과 오만에 사로잡혀 도무지 현실을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없던 적도 만들어내고 아군마저 적군으로 돌리는 ‘뺄셈의 정치’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 더구나 부동산 정책을 비롯해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아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을 일로 키운 게 한두 번인가?

문재인 정권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최저임금제, 주52시간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시간강사법 등 일련의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아름답고 훌륭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정책 시행 시 일어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부작용에 대한 대처 방안이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 충분히 드러났다. 이 또한 진보가 선호하는 추상적 당위의 함정이다. 이는 ‘결과적 위선’으로 지탄받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권은 억울하겠지만, 위선은 관리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말을 앞세우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적어도 정책 영역에서는 현실을 당위적 수사에 종속시키지 말고, 실천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책임 윤리를 가져야 한다. 위선은 진보의 특권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은 낮은 곳의 시대정신을 외면했다. 부동산 정책의 참사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큰 고통을 가했으며, 중대재해법처럼 스스로 내걸었던 ‘사람이 먼저다’는 슬로건을 허황되게 만들었다. 문재인 정권의 민생 실패는 구체와 디테일을 무시하는 진보의 오랜 습속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치밀함과 영악함을 정권 안보에만 탕진함으로써 지지율을 까먹고 말았다. 앞으로 진보 세력이 진짜 가루가 되도록 갈릴 수도 있는 터전을 스스로 만들어준 것이다. 또 적폐 청산을 내걸면서 민주화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다지만, 평등 문제에서는 보수와 비슷하거나 더 못한 점도 있는 무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니 정치와 선거는 ‘밥그릇 쟁취’를 위한 사생결단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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