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으로 삶을 묻다
상태바
‘변신’으로 삶을 묻다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 승인 2021.05.03 0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베르타스]

  “20세기는 카프카와 프로이트의 시대이다”, 공감한다. “카프카는 20세기의 단테이다”, 동의한다. 카프카의 걸작 『변신』을 읽고, 읽고 또 거듭 읽었으므로. 카프카는 대사회적인 거대담론보다는 오히려 세계대전 후 사회적 모순의 중압 아래서 불안과 고독, 무력감 등을 느끼는 개인의 일상사를 중심으로 인생의 부조리들을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그는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는지도 모른다. 
  체코의 유대계 소설가! ‘카프카적(Kafkaesque, kafkaesk)’이라는 단어가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을 비롯하여 여러 유명한 사전에 수록될 만큼 영향력이 상당했던 작가!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도록 유언으로 남겼으나, 사후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들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이름을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킨 작가! 끝내 나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젖어 들 운명이었던 걸작 『변신』을 찬란하게 남긴 작가, 카프카!  

  『변신』은 세계대전 후 1915년이 저물 무렵 출간된, 그다지 길지 않은 중편소설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다루었기에 철학 소설이라 하기도 하고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났더니 벌레로 변해 있더라는 내용으로 환상 소설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침대에서 자신이 한 마리의 끔찍한 갑충으로 형태가 바뀌어 있음을 보았다.” 『변신』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불안한 꿈’을 꾸고 있는 사이에 인간의 육신으로서의 죽음과 '끔찍한 갑충'으로서의 탄생을 동시에 겪은 것이다. 얼마나 기막히게 멋진 소설의 시작인가.
  작은 직물회사의 외판원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떠맡은 가장으로서 그레고르의 상황은 암울하고도 암담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인간으로서의 죽음, 곧 갑충으로 변신한 것은 현실도피의 출구가 아니었나 한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2부로 넘어가면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신한 이후 새로운 삶에 점점 익숙해지는 과정들이 전개된다. 음식물에 대한 성향이 바뀌고 몸가짐 역시 갑충에 걸맞게 자리를 잡아간다.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간이었던 때 매사 수동적이었던 그가 벌레로 변신한 이후 오히려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는 반전이란. 
  3부에 이르면 그레고르는 벌레의 몸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경이로운 상상력이다. 어느 날 밤 누이동생 그레테가 거실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자, 그레고르는 오직 누이동생의 연주를 듣기 위하여 거실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레고르는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레테를 음악 학원에 보내고자 했던, 암담하기만 했던 인간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울러 그레테의 바이올린 연주, 곧 음악이야말로 그가 변신 이전부터 가장 원했던 가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변신 이후 갑충의 몸을 지닌 그레고르는 인간이었을 때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깨달아가고 어느 이성적인 인간보다 사려 깊으며 사색적인 두뇌 활동을 한다. 몸이 갑충으로 변한 이후 그레고르의 정신은 육신과는 반비례적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곧, 그레고르는 그레테의 바이올린 연주로 나타나는 음악이 정신적인 자양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삶을 영위하였고, 신체의 형태를 바꾸면서까지 평생을 바쳐 왔으며, 이제 드디어 그가 바라는 대로 그것을 향유한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 그의 마음이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하여 세상에 아무런 미련 없이 새벽 3시에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면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인간에서 벌레로 변신했던 그레고르의 첫 번째 죽음으로 ‘불안한 꿈’과도 같았던 고달픈 현실에서 그가 해방된 것처럼, 두 번째 죽음으로 그가 사랑하는 가족이 징그러운 갑충에게서 해방된다. 이렇듯 『변신』에 나타난 그레고르의 변신은 두 번의 죽음으로 표현되는데, 두 번의 죽음 모두 그레고르의 삶에 대한 강력하고 자유로운 의지의 또 다른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죽음은 대개 삶의 마지막으로 여겨지지만 이 작품에서의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또 원했던 삶의 시작이자 완성으로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 덩어리에 박힌 사과는 제 아버지가 던진 것이다. 그레고르의 낯짝은 카프카와 닮았다 /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여 할 것은 등장인물의 여정을 묵묵히 따라가는 일이다. 등장인물의 행동과 목소리를 따라 유영하면, 한 편의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으므로. 『변신』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마음자리를 죽 따라가다 보면, ‘변신’의 의미와 의의를 감지하게 된다. 『변신』의 초판 표지 그림을 결정할 때 카프카가 왜 “곤충 그 자체를 그리지 마시오.” “멀리서도 모습을 보여선 안 됩니다.”라고 출판사에 요청하였는지, 그래서 실제로 그려진 것이 어두운 방으로 통하는 문에서 얼굴을 가리며 멀어져 가는 젊은 남자의 모습인지, 그 상징성을 파헤치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동트는 새벽녘의 한줄기 밝은 빛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장면도 오래오래 잔상으로 떠돈다. 

  삶의 근원적인 전제는 어쩌면 죽음이다. “나는 종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작이다.” 카프카가 남긴 산문의 한 부분이다. 하여,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에게 인간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축일 수밖에. 여기서 그는 예술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는다. 예술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며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작업이므로. 이 역시 의미심장한 메타포.

  카프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보다 자유가 아니었을까. 삶과 죽음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 죽음으로, 변신으로, 아니 새로운 삶으로 삶을 질문하고 싶었던 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카프카가 『변신』으로 미리 썼다는 생각.  
 
  “발자크의 산책용 지팡이 손잡이에는 ‘나는 온갖 고난을 무너뜨렸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내 지팡이에는 ‘온갖 고난이 나를 무너뜨린다’라고 새겼다. ‘온갖’이라는 말만은 같다.” 2012년에 우리나라에 출간된 카프카의 책, 『절망은 나의 힘』(한스미디어)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나를 무너뜨리는 온갖 고난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 아울러 나를 일으켜 세우는 온갖 희망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 『변신』을 읽는 시간이다.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