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건축의 도전과 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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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건축의 도전과 응전
  • 조현정 KAIST·건축사
  • 승인 2021.04.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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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전후 일본 건축: 패전과 고도성장, 버블과 재난에 일본 건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현정 지음, 마티, 368쪽, 2021.03)

 

<전후 일본 건축>은 1945년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건축의 주요한 국면을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작가론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어떤 독자들은 건축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다수 포진된 본서의 화려한 라인업에서 어떻게 일본 현대 건축이 놀라운 국제적인 성취를 달성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프리츠커상 최대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 건축의 성공 비결은?” 같은 다소 선정적인 문구로 소개되곤 했다. 사실 서구로부터 모더니즘을 수입한 지 약 1세기 만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선 일본 건축의 성공은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 나름대로 그 답을 찾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 건축의 성공 신화를 쓰는 것이 필자의 주된 관심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건축가 개개인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얼룩진 ‘전전’(戰前)과 다른 ‘전후(戰後)’라는 시공간에서 건축의 새로운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모색해 가는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추적하고자 했다. 이러한 필자의 관심은 이 책의 부제, 즉 “패전과 고도성장, 불황과 재해에 일본건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본서는 일본사의 일반적인 시기 구분을 따라 1) 패전 직후부터 전후 재건이 완료된 1950년대 말까지, 2) 고도 성장기에 해당하는 1960년대, 3) 오일쇼크로 인한 침체기인 1970년대부터 버블기의 경제호황기인 1980년대까지, 4) 장기 불황이 시작된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단락을 나누었다. 각 시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전후 재건기의 ‘국가 건축가’ 단게 겐조, 고도 성장기에 활약한 메타볼리즘 그룹, 197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을 보여주는 이소자키 아라타와 이토 도요, 1990년대 이후 탈전후 건축의 비전을 대표하는 구마 겐고, SANAA, 아뜰리에 바우와우 등을 꼽아 이들에 대한 작가론을 개진했다. 

이러한 구성은 일본 건축가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과 거의 일치한다. 단기간에 패전에서 전후 재건, 경제성장과 불황이라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은 일본사 서술에서 세대론적 접근은 유의미한 분석 수단을 제공한다. 각 세대마다 공유하는 집단적인 경험과 공통 기억이 특정한 주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1913년생인 단게 겐조(1913-2005)가 전후 건축가 1세대를 대표한다면, 구로카와 기쇼(1934-2007), 마키 후미히코(b. 1928) 등 메타볼리즘 운동의 멤버들과 이소자키 아라타(b. 1931) 등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에 출생한 건축가들이 2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학생 시절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윗세대와는 달리 전쟁 책임이라는 문제로부터는 비교적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 목격한 국토 파괴와 폐허의 장면이 이후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단게 겐조, 가가와현 청사, 다카마쓰, 1958, 조현정 사진

3세대 건축가로는 전후 민주주의 교육의 최초 수혜자에 해당하는 1940년대 초반생인 안도 다다오(b. 1941)와 이토 도요(b. 1941)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인 구마 겐고(b. 1954), 반 시게루(b. 1957), 세지마 가즈요(b. 1956) 등 1950년대 생들이 4세대, 마지막으로 1960년대 이후 출생한 아뜰리에 바우와우, 니시자와 류에(b. 1966), 후지모토 소우(b. 1971) 등이 5세대 건축가에 해당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실험적이고 획기적인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넘어, 변화하는 일본 사회의 요구에 맞게 건축가의 주체성과 건축의 역할을 정립해 간 인물들이다. 본서는 이들의 시도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전후 일본 건축을 이끌어간 역동적인 과정에 주목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풍요와 평화를 가능케 했던 ‘전후’ 체제가 급속히 붕괴하면서 건축은 새로운 과제를 떠맡게 된다. 한편에서는 일본 사회의 모순을 정면 돌파하며 대안적인 사회를 디자인하는 건축의 적극적인 역할이 강조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파국의 위기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다소 쉬운 선택지로 ‘일본’이라는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존재가 재소환 되었다. 일본 건축이 과거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던 것처럼, 세계화의 위협과 경제 불황, 인구 위기, 재난과 환경 문제 등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 건축의 선택은 비슷한 난제를 떠안은 한국 건축의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일본 콤플렉스’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넘어서, 일본 현대 건축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이를 통해 우리 건축을 비춰줄 좋은 거울을 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조현정 KAIST·건축사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일본 건축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김중업 다이얼로그』,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 『아키토피아의 실험』, 『시대의 눈』(이상 공저)을 썼고, 『1900년 이후의 미술사』(공역)를 번역했다. Architectural Research Quarterly, Journal of Architecture, Journal of Architectural Education 등 다수의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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