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으로 본 원님재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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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으로 본 원님재판 이야기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4.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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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⑰

잘 알려진 것처럼 국가권력을 입법·행정·사법의 셋으로 나누고, 이를 각각 별개의 독립된 기관에 분담시킴으로써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려는 정치조직 원리를 삼권 분립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제헌 당시부터 이 원리를 받아들인 바 있는데, 현행 헌법에서도 입법권은 국회에,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에, 그리고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 시기를 거슬러 올라 조선왕조에서는 어땠을까?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 지방관인 각 고을 수령은 행정권과 사법권을 동시에 행사하였다. 자연히 고을에서 발생하는 각종 소송은 수령이 처리, 판결하였다. 다만 소송 당사자가 수령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 관찰사 등 상급 기관에 제소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수령은 1심 재판관이었던 셈인데, 흔히 이야기하는 ‘원님재판’이란 조선시대 고을 수령이 주관한 재판을 의미한다. 

고을 수령에게 소지(所志)를 올리는 장면. 소지는 지금의 민형사 소송장 내지 행정 청원서에 해당한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상소제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을 수령의 판결이었다. 따라서 관하 백성들은 어떤 수령을 맞이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했으며, 수령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일희일비하곤 했다. 아래에서는 당시 세간을 떠돌았던 속담을 통해서 원님재판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악판(惡板)과 농판(弄板)은 이해(利害)가 서로 반반씩이다.”

위의 표현은 재판을 담당한 고을 수령의 형벌 집행 스타일에 따른 백성들의 이해득실이 일률적이지 않고 그때그때 달랐던 사정을 이야기하는 말이다. 당시에 백성들은 형벌을 엄하게 하는 수령을 ‘악판(惡板)’, 형벌을 느슨하게 하는 수령을 ‘농판(弄板)’이라 지칭하였다. 

청렴한 수령은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매우 진지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대개 엄하게 다스렸으며,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한 수령은 형벌 집행이 느슨한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재판 때 형벌을 엄하게 하는 악판(惡板)을 만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악판은 엄하고 급하게 엄형을 내리다 보면 간혹 착오를 일으키는 경우가 문제였다. 자연히 악판은 죄는 가벼운데 벌을 중하게 내리는 실수를 범하거나, 의심스러운 사건을 잘못 판결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역으로 형벌이 느슨한 농판의 경우 형 집행이 온건하고 매섭지 않기 때문에 백성에게 큰 원한을 사지 않는 장점도 있었다.

결국, 악판이든 농판이든 각각 장, 단점이 있어서, 재판할 때 악판이라고 항상 이로운 것도 아니고, 농판이 백성들에게 손해만 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수령의 스타일에 따라 소송 당사자들의 이해득실이 그때그때 달랐기 때문에 “악판과 농판은 이해가 서로 반반씩”이라고 풍자한 것이다.

두들겨 패서 만들어낸 옥사, ‘단련성옥(鍛鍊成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행위는 엄히 다스려야 할 중범죄이다. 조선시대에 살인 사건은 대개 관찰사를 거쳐 국왕에게까지 보고되는 사안이므로 수령이 특히 잘 처리해야 했다. 관내에서 변사자가 발생할 경우 해당 고을 수령이 아전을 대동하고 시신에 대한 검시를 해야 했는데, 이때 수령이 검시 과정에서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하면서 사건을 신속히 해결하려는 욕심에서 무리하게 고문을 가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즉 검시할 때 고문하는 것은 불법인데도 행정에 익숙지 않은 수령과 무식한 아전들이 의욕이 앞서서 무작정 형장을 가하거나, 붉은 칠을 한 몽둥이 주장(朱杖)으로 갈빗대를 찔러 자백을 강요했다. 결국 가혹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억울한 옥사를 만들기에 이르니, 이를 당시 ‘단련성옥(鍛鍊成獄)’이라고 불렀다.

조선말기 관아에서 고문하는 장면.

단련성옥에서 ‘단련’은 두들겨 패는 것을 말하고, ‘성옥’은 옥사, 즉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단련성옥이란 명백한 증거 없이 고문을 통한 거짓 자백으로 억울한 옥사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단련성옥’은 조선시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999년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살인 사건의 가해자로 몰린 3인조가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었음이 밝혀져 최근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것에서 보듯이 불과 몇십 년 전에도 일어났던 잘못된 관행이었다.
 
“익힌 노루 가죽”, “성난 두꺼비의 씨름”

소송을 처리하는 목민관은 지금의 판사와 마찬가지로 사건의 전후 사정과 법조문을 참고하여 양측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엄정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당연히 한쪽 말만 듣고 현혹돼서는 안 된다. 하지만 숙련되지 못한 수령들은 갑이 제소해 오면 갑을 두둔하면서 을을 간사한 자로 만들었다가, 다시 을이 제소해 오면 을이 옳다고 하여 앞의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등 아침저녁으로 뒤바뀐 판결을 내리곤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원의 판결이 이랬다저랬다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것을 조롱하여 “익힌 노루 가죽”이나 “성난 두꺼비의 씨름”과 같다고 풍자하였다. 

익힌 노루 가죽이란 한자로 숙녹피(熟鹿皮)라고 쓰는데, 무두질한 사슴 가죽을 말한다. 사슴에서 벗겨낸 가죽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부패해 버리므로 무두질 또는 제혁(製革)이라 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가죽을 손질하는데, 한마디로 가죽을 피혁으로 가공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무두질한 사슴 가죽은 신축성이 좋아 쉽게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수령이 주관 없이 자의적으로 판결하는 것을 익힌 노루 가죽과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녹피에 가로왈 자(鹿皮曰字)”라는 속담도 있는데, 무두질한 사슴 가죽에 쓴 왈(曰) 자는 그 가죽을 당기는 데 따라 일(日) 자도 되고 왈(曰) 자도 된다는 뜻이다.

성난 두꺼비의 씨름이란 한자로 노섬지저(怒蟾之觝)라 한다. 두꺼비가 싸울 때 엎치락뒤치락 종잡을 수 없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음을 말하는데, 이 또한 익힌 노루 가죽과 마찬가지로 수령이 줏대 없이 제멋대로 판결하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속담으로 “두꺼비의 씨름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라는 말이 있다.

한편 무능한 수령을 비꼬는 말로 ‘반실태수(半失太守)’라는 말도 회자하였다. 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절반을 잃게 하는 수령’이라는 의미로, 재물을 다투는 소송에서 수령이 사리를 정확히 분별해 시비를 가리기보다 양측에 절반씩 나누어주는 식으로 적당히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승소해야 당연한 측 입장에서는 수령의 애매한 판결로 생짜로 재물의 절반을 날리게 되는 것이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반실태수를 최하 등급의 수령이라 비판하였다.

“기생과 묘지는 나중에 들어간 자가 주인이다.”

조선후기에 크게 늘어나 사회문제로 비화한 소송이 산송(山訟), 즉 묫자리 다툼이었다. 당시 명당자리에 산소를 모시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묘지 관련 다툼이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남이 먼저 써놓은 묘지 근처에 몰래 조상의 묘를 모시는 투장(偸葬), 남의 묘를 관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파버리는 사굴(私掘), 묘지를 쓰지 못하도록 장례 행렬을 직접 공격하는 벌상(伐喪)은 모두 이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폭행치사 사건의 절반이 산송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묘지 갈등은 큰 골칫거리였다.
이 산송과 관련한 속담 중에 “기생과 묘지는 나중에 들어간 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생과 최후에 몸을 섞은 자가 해당 기생을 차지하듯이 묘지의 경우도 가장 늦게 묘를 쓴 사람이 그곳 주인이라는 뜻이다. 

1813년에 손종원 등 46명이 산송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상주 목사에 올린 고소장. 경주 양동 경주손씨 우재 손중돈 종택 소장.
두 집안 산소의 위치 등을 그린 산도(山圖). 당시 소송을 벌인 양측은 공주 전의이씨 숭선군파(崇善君派)와 이익휘(李益輝)이다. 19세기 중반. 공주 전의이씨 숭선군파 종가 소장.

원래 법에는 산에 먼저 묘지를 쓴 사람에게 묘지 일대의 점유권을 인정하고, 나중에 남의 묘지 근처에 함부로 묘를 모실 경우 남의 묘소를 빼앗은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세도 있고 잘나가는 가문에서 한미한 자의 선영을 차지하고는 이들이 뒤이어 장사지내지 못하게 막고 협박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이것이 소송으로 비화되어도 세도 있는 집안은 나중에 묘 쓴 자가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수령 또한 엉뚱하게 그들의 손을 들어주곤 했는데, 이 때문에 위와 같은 속담이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소개한 속담에서 보았듯이 조선시대 일부 수령들은 원칙과 절차도 없이 제멋대로 재판을 하곤 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원님재판은 모두 엉터리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원님재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지금까지 강하게 남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숙제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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