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여자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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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1.02.2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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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영국의 언론인이자 여성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가 2019년에 쓴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여자들이 보이지 않는 세상, 즉, 여자들의 데이터가 누락되어 ‘남성이 디폴트’인 세상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 분야를 다룬 4부에서는 신약 개발 임상실험 대상에 여자가 포함되지 않은 탓에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출산한 사건, 심장마비나 자가면역질환에서 남자와 다른 여자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는 상황 등이 사례로 등장한다. 오랫동안 남자 중심의 진료 데이터 수집이 관행화된 결과 여자들은 결국 자신에게 맞지 않는 표준 치료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6부로 구성된 이 책의 다른 장들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제설작업이 인도보다 차로 중심으로 이루어진 결과 인도를 보행하는 여자, 노인, 어린이들이 차로 출퇴근하는 남자보다 더 많이 부상을 입고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1부 ‘일상’), 조종사용 센서 조끼나 경찰관 방탄조끼가 남자 신체를 기준으로 디자인되어 여자에게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2부 ‘직장’), 남자 말소리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개발되어 여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음성인식장치(3부 ‘설계’), 육아나 가사 등 GDP에 집계되지 않는 무급 노동을 대부분 여자들이 감당한다는 현실(5부 ‘공공생활’), 난민캠프에 여성용 화장실이 미비해 여자들이 강간 위험에 노출된다거나 재난 피해 복구를 위한 신축 주택 설계를 남자들이 주관하면서 부엌 없는 집이 지어지는 어이없는 상황(6부 ‘재난’) 등등.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어떻게 해야 여자들이 보이게 되는 거지? 저절로 떠오르는 이런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정치인, 고위직 공무원, 기업인 등 의사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가능한 한 많은 여자들이 진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와 원서<br>
저자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와 원서

여자인 나도 미처 몰랐던 많은 상황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불현듯 보이지 않는 존재가 여자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 남성 평균’이라는 데이터에는 동양인이나 흑인도, 빈곤층이나 초고소득층도, 기후나 생활여건이 다양한 지역적 변수도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밖에도 보이지 않는 존재는 수없이 많다.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실제 지구촌에 사는 인류의 모습을 전부 다 반영하는 데이터가 구축되어야 할 텐데 그런 작업이 과연 가능할지, 또 꼭 필요할지 의문이 든다. 비용 대비 효율이라는 경제성 논리를 주입 받은 탓인지, 딱 맞지 않는 신발이나 책걸상에 대충 적응하고 살아온 탓인지 모르겠으나…… 타협할 수 있는 평균선은 어디까지일까?

여자가 주로 담당하는 무급 노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도 고민하게 된다. 저자는 이를 GDP에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인식을 전환하기 위해서도, 더 많은 여자들이 유급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무급 노동이 공공 서비스 차원에 포괄되기 위해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산이 쉽지 않아 보인다. 가사를 돌보는 무급 노동은 가사 도우미의 급여만큼 환산되는 것일까?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는 여성이 가사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녀 양육과 교육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자의 무급 노동이 ‘총생산’에 들어가지 않고 평가절하되는 상황은 돈이라는 교환가치가 유일한 기준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상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무급 노동의 자본화에서 찾는 것이 옳을지, 자본 논리를 뛰어넘는 돌봄과 배려의 가치를 정립하는 것이 옳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러려니 받아들이던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궁리하게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기억하고 고려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여기던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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