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을 통과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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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을 통과하는 우리의 자세
  • 김주일 한동대·도시계획설계
  • 승인 2021.01.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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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팬데믹이 여러 가지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다. 동료관계, 친구관계를 넘어 가족관계까지도 느슨하게 만들다 못해 인수 분해하듯 해체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이런 극적인 변화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꽤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립과 분리, 해체가 이제 ‘뉴 노멀’, 즉 새로운 일상으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자칫 세상이 이렇게 계속 가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든다. 실제로도 팬데믹이 가져온 사회변화가 영구적으로 고착될지 모른다는 예측도 조금씩 나온다. 사실 팬데믹이 가져온 변화가 뜬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20세기 후반 이후 나타난 해체나 양극화 같은 경향들 속에 이미 그런 씨앗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사회로 스며들던 변화가 팬데믹을 틈타 아예 안방에 버젓이 똬리를 틀게 된 격이랄까.

도시계획을 전공하는 사람으로 크게는 두 가지를 염려하게 된다. 첫째는 팬데믹이 도시를 과도한 통제시스템으로 바꿔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팬데믹 재난환경이 사람이 활동하는 모든 곳을 통제와 관리가 필요한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통제와 관리가 필요한 구조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범죄나 대기오염 같은 전통적인 도시문제들에 있어서 통제나 관리는 어디까지나 도시민들 간의 신뢰와 협력에 후속하는 요인들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의 위협은 다르다. 서로를 잠재적인 감염체로 보게 만들어 신뢰와 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 자체를 흔들고 있다. ‘너와 나’의 관계는 이제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다만 전지적인 제3자의 통제가 전적으로 필요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마지노선처럼 생각하던 익명의 사생활도 방역 통제 앞에서는 가차 없는 모습이 불과 1년 만에 정착되지 않았는가. 만약 빅브라더가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폭군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우리의 초청으로 소리 소문 없이 자리 잡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둘째는 이른바 ‘빗장도시’ 현상이 광범위하게 자리 잡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빗장도시란 한 도시가 계층적으로 분리되면서 소통하지 않는 공간으로 나뉘어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미래 도시를 묘사하는 SF영화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설정들이다. 좀비 바이러스나 환경오염으로 더럽혀진 도시에서 상류층은 자신들만의 통제된 공간을 만들고 빗장을 꾹 걸어 잠근다는 식이다. 팬데믹 세상을 살다 보니, 이런 설정이 영화 속 상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세 페스트 사회에서도 상류층은 전염이 없는 지역으로 이동해 출입을 통제했었다고 하지 않는가. 위생과 방역, 그리고 백신도 결국 제한된 자원이다 보니 나라와 지역, 계층 간 차별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올해 말이면 백신이 투입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이 뚜렷이 나뉘기 시작할 판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바이러스에 의한 빗장’이 우리를 가로막는 날이 올지 모를 일이 아닌가.  

상상하다 보면 끝이 없겠지만, 이처럼 팬데믹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여러 시나리오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이 전 세계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위협 앞에서 우리에게 사실 별다른 선택은 없었다. 일단은 갈대처럼 누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누워 그저 바람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갈대가 될지언정, 누워있는 갈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변화를 그저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닥친 현실이라 해서 이를 ‘새로운 일상’으로, 세상의 한 부분으로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다간, 정말로 영원한 팬데믹의 세상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친구의 전화가 부담스럽고 가족 모임마저 꺼려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지만, 그것이 마치 원래 우리의 모습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팬데믹이 가져온 왜곡이 우리의 일상을 영원히 대체할 수는 없도록, 우리는 조용한 저항의식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팬데믹이 사라져 버린 그 어느 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통제와 분리, 해체 속에서 왜곡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벼룩이 수 미터를 뛰어오를 수 있지만, 막상 작은 병에 오래 가둬놓고 길들이면 그 병 높이를 결코 뛰어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의 팬데믹 상황이 우리를 벼룩처럼 가둬놓는 병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 그것이 바로 팬데믹 시대의 의미여야 할 것이다.


김주일 한동대·도시계획설계

한동대학교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도시계획설계 전공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 Champaign 국제도심재개발 교환연구원, 대전광역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행정자치부 지방자치위원,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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