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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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 관리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21.01.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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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_ 대학직설

내가 소속한 학회의 학술지에 ‘온라인 투고시스템’을 통해 투고하고, 엊그제 ‘게재 불가’라는 심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지난해 10월18일에 투고했으니 85일 만이었다. 투고한 지 40여 일쯤 지나도록 아무 연락도 없어 원고가 잘 도착했는지를 전화로 확인한 일이 있고, 70일쯤 지난 뒤 진행 상황을 묻는 메일을 보내 ‘심사 기간은 보름을 준다’, ‘심사 기간이 지나면 독촉 메일을 보낸다’, ‘다양한 이유로 심사를 거절하시는 분이 많아서 심사 수락을 구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다’는 답을 받았다.

그 학술지가 이어서 글을 게재한 어떤 필자의 논증과 주장에 결함이 많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쓰고, 처음부터 투고를 주저하기는 했다. 내 글을 게재하기로 결정한다면 그 학술지는 그 필자의 글을 게재한 자신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해야 하는 곤경에 이를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학술지에 실린 글을 비판하는 글을 다른 학술지에 게재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게재 불가’의 결정에 이런 학문 정치가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반 사회학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의 필수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에는 내 글이 논리도 친절하게 정돈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편향되고 서술이 거칠었다. 아무튼 이 자리에서 심사 결과에 대해 따질 일은 아니다.

심사 결과를 관례대로 한두 달 안에 통보를 받았다면 다시 다른 학술지에 보내 게재를 타진할 수도 있었는데, 뒤늦게 ‘게재 불가’를 통보받음으로써 나는 꼼짝없이 2020학년도 연구실적 관리에서 불이익을 감수하게 되었다. 짐작건대, ‘주례사 비평’에 익숙한 학계에서 ‘사나운’ 글을 심사하는 불편한 일을 수락하는 분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리저리 심사할 분을 찾다가 결국 진행의 책임이 있는 편집위원 중의 누군가가 심사를 떠맡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이유로 심사를 거절하시는 분이 많은 것’이 (다른 학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소속한 분야의 실정이다. 실적으로 계산되는 것도 아니고, (몇 푼의 심사료를 주는 학술지도 있기는 하지만) 돈이 되는 것도 아닌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을 분은 많지 않다. 이제 논문은 ‘심사위원만 읽는다’거나 ‘심사위원도 읽지 않는다’는 자조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등재지 제도가 성과급 제도와 결합된 뒤 ‘발표하거나 죽거나 (publish or perish)’의 원리는 특히 젊은 교수들에게 일상이 되었다. 일정한 총액을 논문 편수에 따라 ‘영합 경기(zero-sum game)’ 방식으로 차등 배분하는 저열한 ‘개수 임금 제도’는 교수들을 만인에 대한 늑대로 만들었다. 교수들은 동료 평가에 최적화된 논문을 쓰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 내 글의 한 심사자는 ‘일반 사회학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을 언급했지만, 학술지에서 그런 글들은 자취를 감췄다. ‘전문’ 독자인 나도 해독할 수 없는 수학 공식으로 무장한 글들이 ‘당신들의 천국’을 이루고 있다. 그 천국에서는 동료 학자들의 글을 읽고 토론하느냐 하면, 학술 논문들의 ‘참고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런 것도 아니다. ‘학문공동체’ 같은 것은 ‘라떼는 말이야’에나 있는 신화이다.

그렇지만 심사 진행의 지체에 내가 조바심을 낸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지난해 봄에 나는 지인의 부탁으로 글을 하나 쓴 일이 있는데, 아뿔싸 그 글을 게재한 학술지가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등재지가 아니었다. 부탁받을 때 ‘등재지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은, 해마다 등재(후보)지에 논문 1편을 발표하지 못하면 ‘등외’로 평가받아 성과급을 못 받을 뿐 아니라, 학과 평가 점수를 낮춰 학과 예산과 학과 동료 교수들의 성과급에도 피해를 주는 제도를 만들어 놓고 있다. 평가 결과야 ‘어차피 기본등급’을 벗어날 수 없게 짜여 있지만, 주변에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논문 1편의 실적은 관리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 학술지가 늦가을에 등재후보지로 ‘승격’(?)했음을 뒤늦게 발견해서, 내 글의 품질과 관계없이 ‘등외’를 면하기는 했다). 이런 실적 관리 제도는 그 자체의 효과보다 그것을 통해 교수들의 사유와 활동을 ‘자발적으로’ 규율하는 효과가 훨씬 더 큰데, ‘정교한’ 장치의 고안에는 끝이 없는 모양이다.
황동규 선생의 일갈이다.
“차렷! 엎드려뻗쳐! (삶아, 삶아, 엿이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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