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이 지식 자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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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 지식 자랑이라면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1.01.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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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학문이 지식 자랑이라고 하는 사이비 학자가 우리 주위에 허다하다. 대학을 점거하다시피 하고 학문을 망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밝히고 바로잡아야 한다.
 
학문이 지식 자랑이라면, 퀴즈 챔피언이 최고의 학자이다. 무엇을 물어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지체하지 않고 명쾌하게 대답하니, 놀랍기만 하다. 대학 교단에서 박식을 자랑하는  교수들은 부끄러운 줄 알고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학문은 퀴즈 풀이와 다르고, 학자는 퀴즈 챔피언이 아니다. 이것이 학문이 무엇인지 논의하는 출발점이 된다.

학문이 지식 자랑이라면, 논문이라고 써내는 글이 남들이 이미 한 말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인용이 많고 화려한 것을 논문의 가치라고 하게 된다. 참고문헌 잔치를 야단스럽게 벌여 위세를 과시하기도 한다. 이런 허세는 학문이 지위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 소용하는 필요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학문은 남의 말이 아닌, 내가 하는 말이어야 한다. 스스로 연구해 남다른 것을 얻어내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학문을 화통하게 알고 있다고 뽐내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 너무 유식해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의 말을 다하고 시간이 남으면, 내 말을 하겠다는 것인가? 남들의 말을 다할 수 없고, 시간은 언제나 모자란다. 나의 생명도 남들에게 양보할 것인가? 학문은 내가 내 삶을 살자는 행위이다.
 
학문이 지식 자랑이라면, 월등하게 많은 지식을 간직하고 있는 인터넷과 경쟁하다가 패배하고 만다. 인공지능은 소문만 듣고도 두렵게 여겨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무엇을 아는 체하면 학생이 즉시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세상이 되었다. 학생들은 알고 있는데 자기는 모르는 것을 가르친다고 나설 수는 없다.

“life 10,110,000,000; man 9,280,000,000; history 6,210,000,000, nature  4,830,000,000; idea 3,250,000,000; truth 1,010,000,000” 이것은 인터넷 사이트 Google에 올라 있는 자료 건수이다. 읽기 쉽게 만하면, 맨 위의 ‘자연’은 101억 건이고 맨 아래의 ‘진리’는 10억 건이다. 이런 자료를 사람이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이니 박람강기(博覽强記)이니 하는 것이 이제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

학문을 지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료가 많은 것을 보면 아주 반가워한다. 자료 존중의 의의가 한층 분명하게 입증될 수 있다고 여긴다. 잘 활용해 딴소리를 못하게 하려고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잡다한 자료가 너무나도 많아 난감하다. 참된 것과 거짓 것을 구분하는 자료 검증이 선결과제인데, 작업량이 너무 많아 엄두가 나지 않고, 진위 구분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귀납적인 연구를 하는 오랜 방법은 자료가 너무 많아 감당하지 못한다. 통계 처리의 새로운 방법으로 컴퓨터에 일을 시키는 것은 용이해도, 어떤 명령어를 얻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너무 많은 자료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인공지능에 맡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료는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고, 기상천외의 결과를 내놓을 것인가?

위에서 든 항목 ‘자연’, ‘인간’, ‘역사’, ‘자연’, ‘이상’, ‘진리’ 등에 관해서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하고 자기의 창조적인 견해를 마련하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다. 이에 관해 학생들과 토론하는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을 창조의 주체이게 훈련하는 것이 교수가 할 일이다. 그래 보았자 제시한 견해가 100억 개의 하나가 되고 만다는 허망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지구는 사람이 알고 있는 숫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천체의 하나이면서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의의가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지구상의 많은 장소의 하나이면서 내게는 가장 소중하다. 나는 70억의 하나이지만 인간을 대표해 인간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창조적 사고의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를 당당하게 지닌다. 양에서 질로, 확장에서 중심 잡기로 방향을 돌려, 창조의 주체로서 자각을 분명하게 하고 대우주까지 이론으로 장악하는 거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  
 
논의가 너무 추상화되어, 알기 쉽고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든다. 박지원(朴趾源)의 <호질>(虎叱)을 연구하기 위해 호랑이에 관한 자료를 10만 점 모았다는 학자가 있었는데, Google에 올라 있는 자료는 ‘호랑이’가 26,800,000건이고, ‘tiger’가 796,000,000건이다. 2천 6백만, 7억 9천만 건 이상이라는 말이다. 10만 자료를 이용해서는 얻지 못한 결과를 이제는 기대할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그 많은 자료가 아무 소용도 없다. <호질>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나무란 말이 인간의 도덕적 우월성 주장에 대한 기(氣) 철학의 논박임을 알면 알 것을 다 안다. 선악이 삶을 누리는가, 해치는가에 따라 구분되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라고 하고, 사람은 배가 불러도 살생을 일삼고 동족도 죽이니 호랑이보다 더 악하다고 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풀이하는 것은 이해를 돕는 데 필요한 췌언이다. 지식이 아닌 판단, 이해가 아닌 행동이 문제이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제 지식 장사를 하는 시대는 끝난 것을 알아야 한다. 학문이 지식 자랑이라고 계속 우기면, 타당성은 검증하지 못하고 지식을 받들기만 하다가 지배당한다. 오래 두고 받들고 섬기면 지식이 엄청나게 늘어나, 낮은 자리에서 엎드리고 있는 경배자의 시야를 가리고 숨이 막히게 한다. 학문은 지식의 생산자이고 심판자이다.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엄정한 자세로 할 일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인터넷이나 인공지능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고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학문이 지식 자랑이라면, 자랑을 일삼는 사고나 태도가 차등의 사고를 키워 헛된 우월감에 사로잡히도록 한다. 귀천과 빈부의 차등 못지않게 지식의 차등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헛소리를 한다. 학문은 모든 차등을 넘어뜨리고 대등을 실현하는 투쟁이다. 누구나 대등하게 지닌 창조주권을 대등하게 발현하기 위해 잡다한 지식이라는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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