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시조는 朱蒙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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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시조는 朱蒙이 맞는가?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12.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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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34)_ 고구려의 시조는 朱蒙이 맞는가?
 
“自昔帝王易姓受命. 必遷厥邦. 以興一代之治 (예로부터 제왕이 성(姓)을 바꾸고 하늘의 명을 받으면 반드시 그 도읍을 옮기어 한 시대의 정치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陽村先生文集卷之一 進風謠 幷序 中

위의 글은 충주(忠州)의 노천기로(駑賤耆老) 즉 둔하고 천한 늙은이를 자처하는 여말선초의 문인 양촌 권근이 역성혁명에 성공하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에게 지어 바친(製進) 풍요(風謠) 並書의 일절이다. 촌로(村老)로 있다가 후일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가 된 양촌 선생은 다시 숭화시 병서(嵩華詩 幷序)를 써 올리며 그 글 속에서 몇 개의 천도 사례를 언급한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옛날의 제왕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옮김에 있어서는 각기 영가(詠歌)의 사(詞)가 있어 그 공을 찬미하여 성률(聲律)에 올려서 영원토록 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주(周) 나라 시(詩)를 상고해 보면, 공류(公劉)가 빈(豳)에 옮기고, 태왕(太王)이 기산(岐山)에 옮기고, 문왕(文王)이 풍(豐)에 옮기고, 무왕(武王)이 호경(鎬京)에 옮길 적에 모두 다 시를 엮어 아(雅)가 되고 송(頌)이 되어, 마침내 수천 년 후에도 당시 군상(君上)의 거룩한 다스림의 공덕과 신자(臣子)의 임금을 사랑하매 아름다움을 돌린 정성을 상상해 볼 수 있으며, 또한 모두 감발하여 흥기시킨 바가 있게 되었으니, 시가(詩歌)의 힘이란 과연 적지 않다 하겠습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고구려 역사 기술에서 건국주로 알려진 주몽이 태조가 아니고 6대 高宮이 태조대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의아했다. 『삼국사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휘는 주몽이라고 적혀 있다. 왕건도 고려 태조요, 고려를 전복하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태조, 그밖에 명태조, 청태조, 금태조, 요태조도 나라를 새로 세운 왕들인데⸱⸱⸱⸱⸱⸱. 삼국사기에 이미 태조왕을 국조왕(國祖王)이라고 했으니 이것만 봐도 태조왕이 고구려의 시조여야 한다.

그리고 주몽의 姓에 대한 기술도 일관성이 없다.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삼국유사』 「王曆」은 주몽의 성이 고씨라고 적고는, 권1 고구려조 주에서는 “本姓解也”라고 달리 말하고 있다. 주몽의 아들 유리와 유리왕의 아들 대무신왕, 대무신왕의 아들 민중왕의 성도 모두 해씨라 했다. 삼국사기도 마찬가지다.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 민중왕의 휘를 해읍주, 모본왕의 휘를 해애 혹은 해애루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국조왕인 태조왕부터는 성씨를 쓰지 않았다.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해야 마땅하나, 이번 글에서는 문헌 사료의 부족을 구실 삼아, 그리고 의심을 해결하기 위한 잠정적 방법으로 적은 증거를 바탕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려고 한다. 모두에 인용한 글에서의 역성(易姓)을 전 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를 세운 이가 자신의 성을 바꾸거나, 고치거나, 새로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면, 역사적 의문점 몇 가지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만 있었지, 氏姓이든 族姓이든 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힘이 정의인 사회에서 힘을 가진 집단은 자신들의 존재 부각을 위해 姓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미지 쇄신의 목적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내부의 자중지란에 기인하는 정권교체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지만, 성이나 족속이 완전히 다른 집단에 의한 쿠데타의 경우, 특히 천지개벽형 반역의 경우는 자신들의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새롭게 왕조를 개창하는 것이 뱃속 편했을 것이다.

우마야드 왕조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신생 이슬람 정권 압바시드 왕조는 기존의 수도 다마섹(오늘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을 버리고 바그다드라는 신수도를 건설한다. 이곳을 배경으로 아라비안나이트, 신밧드의 모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과 같은 흥미진진한 문학작품이 탄생한다. 바그다드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모든 정보가 수합되고, 재화가 유입되고, 학문이 꽃 피는 그런 곳이었다.

후한이 멸망하며 파란만장하게 전개되는 중원의 삼국시대와 잇따른 화북(華北, 북중국)의 五胡十六國시대를 지나 위진남북조시대가 열리면서 유목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은 탁발선비다. 위진시대(魏晉時代, 220~420년)는 삼국시대의 위나라로부터 서진을 거쳐 동진에 이르기까지 약 2백 년간의 시기를 말하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년)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한족을 장강 이남으로 밀어낸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탁발선비는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초대 황제 도무제)가 代지방에 새 나라를 세우며 국명을 魏라고 했다. 사가들은 탁발선비가 건국한 魏를 전국시대 위나라와 조조의 위나라(曹魏)와 구별하기 위해 北魏, 大魏, 代魏, 元魏 등으로 불렀다. 탁발씨가 지배했다고 하여 拓跋魏라고도 한다. 원위는 元씨의 위나라라는 의미다. 바로 이 원씨가 탁발씨다. 496년 효문제 탁발굉이 “土爲黃中之色, 萬物之元”이라는 이유를 들어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황실의 성을 탁발(拓跋, 순록)에서 원(元, 으뜸)으로 고쳤다. 모든 功臣舊族의 성도 다 고쳤다. 이때 복성인 可地延氏도 단성인 延氏가 되었다.

이렇게 皇姓을 바꾼 까닭은 무엇일까? 구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지배자가 된 신세력은 자신들의 출신에 권위를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천하고 무식한 존재로 인식되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야만스런 유목민이라고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할아버지가 성은 없고 이름만 작제건(作帝建), 아버지도 용건(龍建)이라는 이름만 있는 집안 출신의 왕건(王建)도 삼한(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라는 새 나라의 태조로 새 왕조를 열기 전까지는 당연히 왕씨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고려 왕실 공식 족보인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은 왕건이 877년 1월 31일 송악(松嶽)의 남쪽 자택에서 송도의 신흥 호족 왕륭(王隆)과 그의 부인 한씨(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이 되면서 王姓을 왕으로 하고, 자신의 가문 정리에 들어갔을 것이다. 왕에게 어울리는 집안 내력, 즉 조상 추존을 통한 족보 작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년) 때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김관의가 태조 왕건의 족보를 채집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의하면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 강씨(貞和王后 康氏)는 고구려계 신라인 강충(康忠)의 증손녀이자 고구려 출신의 신라 장군 강호경(康虎景)이 그녀의 증조부이다. 그렇다면 왕건은 혈통 상 고구려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심하게 의심을 풀어놓자면 康이라는 성은 중앙아시아 하중지방 사마르칸드를 기반으로 하는 康國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건의 몸속에는 소무구성의 하나인 강성(康姓)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고려 태조 왕건은 원래 없던 성을 새로 만들어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망하고 부속되었던 속말말갈의 추장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또 다른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자신들의 부중(部衆, 부족민)을 이끌고 감행한 고난의 행군과 시련 끝에 유명을 달리하고,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천문령 전투(698년)에서 당군을 격파한 뒤 동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새 나라를 세웠다. 처음에는 ‘떨칠 진’을 쓰는 振國으로 건국했다가 713년 발해(渤海)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현대 중국어 병음으로 /bo hai/로 읽히는 渤海는 ‘늑대’라는 뜻의 몽골 여진어 /bukha/의 음차어다.

건국주는 太祖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 왕건도 태조고, 조선도 태조 이성계가 있다. 그런데 발해의 초대왕 태조는 누구인가? 유목민 출신으로 성이 없던 대조영은 왕성을 大로 삼고 高王이 된다. 고왕은 고구려인 왕이라는 말일까? 그보다는 漢나라 호칭방식에서의 高祖와 같은 개념의 王號라고 판단된다. 개국과정에서의 역할이 한고조 유방, 당고조 이연과 닮았다는 의미에서일 수 있다. 초대왕을 高祖나 高王이라고 하는 경우는 후대왕을 무왕, 문왕, 성왕 등으로 기록하는 유사점이 있다.

고구려의 역사는 東明聖王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선사자(善射者, 활 잘 쏘는 사람)’라는 의미의 부여어 주몽(朱蒙)이다.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남으로 피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성은 당연히 부여의 王姓인 해(解)씨였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또는 國祖王)의 휘는 宮이요 小名은 어수(於漱)로 유리(琉璃)왕자인 고추가 재사(古鄒加 再思)의 아들이며 모태후는 부여인이라고 전한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高句麗條에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鄒加”라고 한바, 왕을 내는 가문 내지 집단의 大加는 다 古鄒加라고 칭한다는 말이다.

5대 모본왕이 죽고 태자가 불초하여 족히 사직의 주가 되지 못하겠기에 백성들이 高宮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는 기록은 異姓에 의한 정권 인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몽으로부터 모본왕으로 이어진 해씨 혈통이 세력을 잃고 宮을 내세운 고씨가 정권을 획득한 것이다. 이후 국명은 고려로 정착된다. 이전의 해씨 국가는 구려(句麗)였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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