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의 단계와 학문의 진전
상태바
생애의 단계와 학문의 진전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0.11.15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동일 칼럼]

생애에는 단계가 있다. 생애의 단계에 따라 하는 일이 달라지게 마련이며, 학문도 이런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장차 내 생애의 단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이에 따라 학문에서 어떤 진전이 있어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필요한 계획을 세우고 싶었으나, 적절한 방법이 없어 잘 하지 못했다. 참고할 만한 전례를 발견하지 못하고, 모든 의문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이제 학문에 종사한 지 50년이 지나고 나이는 80이 넘었다. 그동안의 경과를 정리해 나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연구를 한참 진행하다가 방향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중견 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나의 경우가 일반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자료로 이용될 수 있기를 바라고, 업적 연표와는 성격이 다른 연구 성격의 변화를 정리하려고 시도한다.   

생애의 단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학문의 진전을 우선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학위논문, (2) 주문생산, (3) 계획생산이다. (1) 학위논문을 써서 학자로 나서서 교수가 되면, (2) 연구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있어 주문생산을 하게 된다. 주문생산에만 매달리지 말고, (3) 계획생산을 해서 커다란 업적을 이룩해야 한다. (1)을 30대에 하고, (2)를 40대에 하다가, (3)을 50대까지 하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이다.

나는 (1)의 과정을 35세에 거쳤다. 29세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제출할 준비가 되었으나, 과정 이수가 필요 없는 구제박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신제박사 학위를 처음 받느라고 여러 해 늦었다. 논문 제목은 <영웅소설 작품구조의 시대적 성격>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영웅소설이라는 연구대상을 자료 검토, 작품 분석, 철학과의 관련, 사회사적 이해에 걸쳐 고찰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다면적 고찰을 한 것이 세 가지 의의를 지닌다. 논란이 되고 있는 방법을 두루 익혔음을 알린다. 여러 방법의 통합 가능성을 찾는다. 심사위원들이 각기 다른 요구를 할 것을 예상하고 대비한다.   

(2)의 주문생산은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가벼운 것은 더러 수락하고 업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힘든 과제를 부득이 맡아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도 있어, 불운이 행운이기도 하다. 34세에 쓴 <미적 범주>가 이런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한국사상사대계>>라는 총서를 기획하고 그 제1권에서 한국문학을 다루기로 했다. 다른 논제는 스승 세대의 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한국문학의 미적 범주는 적임자가 없어 집필자의 연령을 파격적으로 낮추어 나에게 맡겼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작업 기간 연장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한국문학의 미적 범주는 논의한 전례가 없어, 미적 범주 일반에 관한 서구 미학자들의 견해를 가져와 내 관점에서 정리해야 했다. 미적 범주는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의 상반 또는 융합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고, 각 범주에 해당하는 작품을 한국문학에서 찾고 상관관계와 변천과정을 고찰했다.

(3)의 계획생산은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해서 제시할 본보기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둘만 든다. 우리가 한문을 받아들인 것은 불행이 아니고 행운이었음을 세계적인 비교고찰에서 입증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부분적으로 시도하다가 60세에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에서 총괄했다. 중세는 어디서나 공동문어와 민족어를 함께 사용하는 이중언어의 시대였다. 한문, 산스크리트, 팔리어, 아랍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의 공동문어문학이 자리를 잡아 민족어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고 민족어문학이 발전할 수 있게 한 사실을 하나씩 고찰하고 총체적으로 비교해, 진정으로 보편적인 세계문학사를 서술할 수 있는 기초공사를 했다.
 
62세에는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에서 소설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변천했는지 사회사와 관련해서 고찰하는 작업을 세계적인 범위에서 진행했다. 학위논문을 쓸 시기의 작업을 시발점으로 하고, 30년 가까이 노력한 성과의 집약이고 발전이다. 한국문학 연구의 성과를 가지고 동아시아문학을 재론하고, 세계문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작업을 하면서, 소설에 대한 기존의 이론을 모두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작품을 취급한 범위나 전개한 이론 양면에서 국내외의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작업을 했다.

(1) 학위논문, (2) 주문생산, (3) 계획생산으로 학문이 한 단계씩 진전을 이룩하면 할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몇 단계가 더 있다. (4) 이론 창조, (5) 학문 창조, (6) 문명 전환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단계는 생소하고, 여기서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하기 어려워 글을 한 편 더 쓰기로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