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근본 개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한 새로운 돌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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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근본 개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한 새로운 돌파구
  • 선우 환 연세대학교·철학
  • 승인 2020.1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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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때문에: ‘때문에’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연구』 (선우 환 지음, 아카넷, 528쪽, 2020.09)

과학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설명(explanation)의 본성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연구 과제이어 왔다. 과학에서 설명은 ‘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표준적으로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저러저러하다”와 같은 형식의 문장으로 제시된다. 과학철학자들은 어떤 경우에 그런 대답이 받아들일 만하거나 옳은 대답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과학철학의 그런 연구는 설명 문장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때문에(because)’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고, 설명에 대한 이론 속에는 그 말의 의미에 대한 규정을 부지불식간에 포함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자들 - 더 나아가 철학자들 일반 - 은 ‘때문에’의 의미 자체에 대한 주제적인 탐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이 “지식이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을 통해서 ‘안다’, ‘자유롭다’ 등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들을 해 왔던 것에 비하면, 우리 사유에서 매우 근본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때문에> 개념에 대한 분석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신 과학철학자들은 설명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때문에> 개념에 대해서 간접적인 탐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때문에: ‘때문에’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서 ‘때문에’의 의미에 대한 언어철학적, 논리철학적인 탐구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를 통해서 과학철학 분야의 학자들이 설명 이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때 부딪혔던 오해들을 해소하고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때문에> 개념에 가까이 있는 개념으로서 흔히 철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된 또 다른 개념은 인과(causation)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세적 인과 개념은 <때문에> 개념보다는 훨씬 좁은 범위에 적용되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때문에> 개념과는 다른 함의들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인과 개념을 나타내는 ‘야기하다’나 ‘원인이다’와 같은 술어적 표현들은 논리학에서 관계 술어라고 불리는 표현들로서, 그 표현들이 적용되는 관계항들인 원인 사건과 결과 사건은 흔히 내재적 특성을 가진 물리적 과정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인과 개념에 대한 탐구의 과정에서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와 같은 철학자는 인과 개념을 ‘반사실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조건문을 사용해서 분석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러한 조건문은 자연언어에서의 가정법 조건문에 상응하는 조건문으로서, 현실에 반(反)하는 가정을 하면서도 사소하지 않게 진리 조건이 부여되는 종류의 조건문이다. 이런 제안은 한편으로는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가 물리적 과정에 의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에 관련된 직관들과 충돌하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많은 난제를 낳았다. 이후에 컴퓨터과학자인 주데아 펄(Judea Pearl), 과학철학자인 제임스 우드워드(James Woodward) 등이 인과 개념에 대한 훨씬 복잡한 형태의 반사실 조건문적인 이론들을 제시했지만, 인과 개념은 반사실 조건문을 통해서도 그 밖의 다른 조건을 통해서도 규정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하게 되었다.

반면 나는 내 책에서 <때문에> 개념에 대해서 반사실 조건문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할 때 논리적으로 매우 명쾌하고 분명한 분석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 나는 ‘P이기 때문에 Q’ 형식의 문장이 ‘P이지 않았더라면 Q이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형식의 반사실 조건문을 통해서 분석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안했다. 인과 개념에 대해서 반사실 조건문으로 분석하고자 할 때는 상당히 복잡한 분석이 요구되고 그런 복잡한 분석으로도 많은 반례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때문에>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은 매우 단순한 형식의 분석이다. 그리고 이 분석에 대해서는 인과 개념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직면하는 반례들이 처음부터 제기되지 않거나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또한 ‘R이 아니라 P이기 때문에 S가 아니라 Q’ 형식의 대조적 설명(contrastive explanation) 문장이 ‘P이지 않고 R이었더라면 Q이지 않고 S였을 것이다’라는 형식의 반사실 조건문을 통해서 분석할 수 있듯이, 이러한 분석은 보다 복잡한 경우에 대해서도 훨씬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다. 

오늘날 과학철학에서의 지배적 견해는 설명이 인과 개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즉 ‘때문에’를 포함하는 설명 문장은 피설명항(즉 설명되어야 할 것)에 대한 인과적 정보를 제시하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인과 개념보다도 오히려 <때문에> 개념이 보다 더 근본적이고 단순한 개념이라는 것을 논증했다. 그리고 <때문에> 개념이 반사실 조건문을 통해서 어떻게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는지 다양한 논의를 했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책에서 <때문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설명, 인과 등에 대한 이론들을 발전시킴으로써, 나의 접근이 어떤 점에서 설명과 인과에 대한 경쟁 이론들보다 더 우위에 있는지를 다각적으로 보였다.  
 
이 책을 위한 연구를 하고 저술을 하는 기간인 최근 10여 년 사이에 영미권의 형이상학에서는 형이상학적 설명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고, 과학적 설명이 (과학철학의 지배적 생각에 따르면) 인과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시하듯이 형이상학적 설명은 이른바 기반(grounding)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시한다는 생각이 유행하게 되었고, 기반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최근 논의를 반영하는 두 개의 장을 책에 추가하여서 형이상학적 설명의 문제도 다루었다. 나는 이 장들에서 형이상학적 설명에서 사용되는 <때문에> 개념도 마찬가지로 반사실 조건문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설명들에서 사용되는 <때문에> 개념에 대해서 통합적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이 책에서의 논의들이 성공적이라면, 우리는 인과와 기반 등 별도의 개념들에 대한 별도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도 단일한 <때문에> 개념을 통해서 다양한 종류의 설명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의 철학적 논의에서 주제적 관심 대상으로부터 비켜나 있었던 <때문에> 개념을 중심 대상으로 삼아 탐구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다른 개념들과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연구 작업들을 포함하고 있다.


선우 환 연세대학교·철학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런던대학교 철학과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논리철학, 언어철학, 형이상학이 주 전공 분야이지만 인식론, 과학철학, 심리철학 등의 분야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때문에』, 『김재권과 물리주의』(공저), 『서양철학과 주제학』(공저), 『기호논리학』(공역) 등의 저서와 역서를 냈고, 「물리주의와 지식 논변」, 「통세계적 동일성의 문제와 양상 인식론」, 「회의주의 문제와 지식의 정당화 조건」 외 다수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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