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 크로키와 염통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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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크로키와 염통 전문의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0.10.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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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에세이]

음식점 가운데 흔하지는 않으나 소나 돼지의 각종 ‘특수 부위’들을 파는 곳이 있다. 폐, 심장 이런 것들을 판다. 나는 비위가 약한 편이라 그런 부위들을 잘 못 먹는다. 그래도 음식은 별로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편이다. 좀 된 얘기지만 운동하다 갑자기 죽은 코미디언 김형곤이 맛집 찾아 두세 시간씩 다니는 짓이 제일 바보 같다면서 “다 맛있지 않냐?”라고 했다는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도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는 않는다. 맛없어도 잘 먹는 편이다. 맛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환경을 더 좋아한다. 아무리 둘이 먹다 하나 죽을 듯이 맛있어도 사람들 바글거리는 데서 한 시간 기다리고 주문하느라 소리 질러 가며 먹는 것보다는 차라리 굶는 것을 택한다. 그런 데서는 혈압이 올라 힘들다. 경미한 공황장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나 돼지의 폐나 심장, 간, 신장 이런 것을 잘 먹는 사람들 가운데는 의사들도 많으리라 본다. 염통 전문의, 창자 전문의, 콩팥 전문의 이런 사람들, 특히 외과의들은 비교적 위험 부담 없고 수익이 높은 피부과나 성형외과 의사들보다는 힘들고 고달픈 직업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외과 지망생들이 적어서 문제가 많다고 한다. 특히 예전에 소말리아 해적들과 대적하다 여러 군데 총상을 입은,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 나는 석 선장 같은 이를 살리는 전문 의사들은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한다. 너무 힘들고 병원에 수익도 올려주지 못하여 그렇단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어디 의사들 세계에만 있겠는가?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다 그렇다. 낄낄대는 우스개는 잘 팔려도 심각한 얘기는 잘 안 팔리는 법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유치하고 조잡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일에 특별히 혈관을 세울 일도 아니다.
 
요즘은 잘 못 듣는 얘기지만 공중 목욕탕에 불이 난 일이 가끔 있었다. 목욕탕에 불난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라.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을 것이다. 여탕에 불이 나서 여자들이 누드로 뛰쳐나왔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는 것 같다. 괜히 성차별이니 성희롱이니 하는 시비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이를 다음과 같이 고친다. 남탕에서 불이 나서 남자들이 누드로 우르르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것을 관람하는 다른 남자들은 좀 괴로웠겠다.
 
미술관에 오랜만에 그림을 구경하러 갔다. 이름을 잘 모르는, 화가가 안 유명해서가 아니라 내가 무식해서 그 이름을 모르는 화가가 그린 알몸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알몸 그림 중에서도 알몸 크로키가 가장 역동적이고 내 맘에 쏙 든다. 나도 알몸 크로키를 좀 해본 적이 있다. 알몸 얘기를 하다 보니 내가 재직했던 학교 앞에서 팔던 알몸 김밥이 생각난다. 김을 밖으로 싸지 않아서 알몸이라고 했나보다. 재미있는 이름이다. 그래도 안알몸 김밥보다는 맛이 덜했다.
 
요즘은 알몸 전성시대인지 이름이 덜 알려진 연예인들이 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노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고 한다. 빨간 양탄자 위를 걷다가 아이쿠 하면서 옷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 언론에서 다루어준다는 것이다. 아이쿠 참 기발한 생각이다. 그리고 애처로운 생존 전략이다.
 
몇 해 전에 아내와 함께 종합 검진을 했다. 기본 검사에 더하여 나는 밥통 내시경을, 아내는 큰창자 내시경을 했다. 수면 내시경이라 몽롱해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다 끝나 있었다. 조금 몽롱히 걸어 나왔다. 밥통이니 큰창자니 염통이니 콩팥, 허파 같은 데가 모두 이상이 없었다. 다행이다. 앞으로는 건강한 창자와 밥통으로 소나 돼지의 특수 부위들, 곧 폐니 간이니 신장이니 먹기를 시도해 볼까? 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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