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와 음독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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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와 음독자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10.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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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⑪_간수와 음독자살

독약과 간수

조선 정조 때 간행된 법의학서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이란 책자를 보면 당시 다양한 유형의 변사 사건이 발생할 경우 담당 관리가 이를 검시하는 방법이나 검시 재료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는 독을 먹고 사망한 중독사(中毒死) 항목도 있는데, 여기에는 독극물로 쓰인 재료, 마신 뒤의 증상과 사망 후 모습까지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책에 기재된 독극물 중에 사약(賜藥)의 재료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비상(砒礵)’과 ‘부자(附子)’이다. 비상의 주성분인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독성이 아주 강한 물질이었다. 그리고 부자는 미나리아재빗과의 다년생 초본식물인 투구꽃의 뿌리를 건조시켜 만든 것이다. 투구꽃은 적정량을 지키면 마취약 등 약재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이를 넘어서면 결국 강한 중독증상이 발생하여 사망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야갈(野葛)이라고도 하는 ‘구문초’, 중국 강남지역에서 나는 ‘서망초’ 등도 대표적인 독초(毒草)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밖에 중독을 조심해야 할 액체로 ‘수은’과 ‘염로(鹽滷)’도 거론된다.

▲ 관리가 사사(賜死)되는 장면. 사약의 재료는 비상과 부자로 추정된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 관리가 사사(賜死)되는 장면. 사약의 재료는 비상과 부자로 추정된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여기서 염로라 한 것은 간수를 말한다. 간수는 잘 아는 것처럼 습기를 빨아들인 소금 가마니를 쌓아두면 흘러나오는 쓰고 짠 물인데, 이 소금에서 뺀 침출수인 간수의 주성분은 황산마그네슘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간수를 버리지 않고 두부를 만들 때 응고제로 사용했는데, 간수는 염로 외에 노수(滷水), 고염(苦鹽)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간수는 독성을 지녔기 때문에 때때로 조선후기 민간에서 음독자살용 재료로 종종 쓰이곤 했다.

유씨부인이 남긴 유서

1899년(광무 3) 11월에 충남 서산군 동안면 부단리에서 한 여인이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한다. 그녀의 성은 유씨(柳氏), 나이는 47세. 먼저 죽은 남편 삼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한옥동(韓玉東)이라는 겨우 12살 난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그녀가 남긴 마지막 글은 다음과 같다.

유서를 쓰려고 붓을 잡으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눈물이 솟아 눈동자를 가리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이 몸이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 죽으니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 나의 원수 갚아 주옵소서. 홍서방 오거든 주려고 술 두어 잔 받아두고 주지도 못하고 세상을 이별하니 어찌 탄식하지 아니하리오. (『충청남도 서산군 동암면 부단리 치사여인 유씨 옥사문안』, 유씨부인의 유서)

사건 조사 보고서인 검안(檢案)에 따르면 사위인 홍서방에게 술 한잔 건네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한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관련한 추문(醜聞)이 떠도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같은 마을에 사는 종질(從姪) 유치극(柳致克)과의 불륜에 관한 소문이었는데, 이를 퍼뜨린 자가 이웃 양반 임충호(任忠鎬)였다. 수절하고 있는 자신이 간통이라니? 그것도 근친 사이인 5촌 조카하고? 결국 유씨부인은 목숨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자신에 대한 성추문을 퍼뜨린 원수 임충호를 처벌해달라는 하소연과 함께...

이 사건은 조선시대 검안을 분석한 책을 낸 경인교대 김호 교수에 의해서 자세히 소개된 적이 있는데, 유씨부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 마신 것이 바로 간수였다. 군수가 작성한 옥안에는 사건의 현장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유여인이 마신 간수를 담은 그릇이 그려져 있었다.

▲ 해미군수 김홍규가 작성한 사건 보고서에 실린 유씨부인의 유서. 한글로 작성되었다. 규장각 소장
▲ 유씨부인이 마신 간수는 ‘투구리’라 부르는 흙으로 만든 그릇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림은 사건 보고서에 그려진 투구리 모습이다. 규장각 소장.

중독 시신의 검시 방법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손톱과 발톱이 문드러지며, 가슴에 손톱 상처가 있다. 통증이 심하므로 땅에서 구르고 스스로 가슴을 문지르기 때문이다.

『증수무원록』에는 간수를 마시고 죽은 시신의 처참한 모습을 위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간수를 음독한 사람은 간수의 강한 독성으로 인해 속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어 보통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뿐만 아니라 가슴에 손톱자국이 생기고 손톱이 문드러질 정도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죽어갔다. 이로 볼 때 서산의 유씨부인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시신의 음독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검시에는 대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일반적인 방법은 은비녀를 이용하는 것이다. 은비녀를 취엄나무의 껍질을 삶은 물인 조각수(皂角水)로 깨끗이 씻은 후 시신의 목구멍에 넣어보는 것인데, 이 때 독살인 경우 은비녀가 청흑색으로 변한다. 은이 유황, 질소나 화합물과 반응하는 성질을 이용해서 이를 함유한 독극물을 검출하는 방법인 것이다.

▲ 『증수무원록』 언해본의 ‘응용법물(應用法物)’ 부분. 은비녀, 닭과 백반 외에도 술, 지게미, 식초, 매실, 감초 등 검시할 때 쓰이는 여러 재료가 나열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 『증수무원록』 언해본의 ‘응용법물(應用法物)’ 부분. 은비녀, 닭과 백반 외에도 술, 지게미, 식초, 매실, 감초 등 검시할 때 쓰이는 여러 재료가 나열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또 다른 하나는 백반과 닭을 이용한다고 해서 반계법(飯鷄法)이라 부르는 방법이다. 백반 한 뭉치를 죽은 사람의 입안 목구멍에 넣고 종이로 입을 덮는다. 1, 2시간 지난 후에 밥을 꺼내서 살아있는 닭에게 먹여보는 것이다. 만약 음독자살이라면 백반을 먹은 닭 또한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764년(영조)에 독살 여부 판정에 반계법을 쓰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실험에 이용한 닭을 백성들이 먹고 문제가 생길까 우려한 국왕의 명령에 따른 것인데, 영조는 부득이 반계법을 써야 한다면 사용 후 닭을 즉시 폐기하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조카와의 불륜 소문에 죽음으로 결백을 주장한 서산 유씨부인의 경우 시신에 대한 별도의 검시가 생략되었다. 유여인이 쓴 유서(遺書)와 간수를 담은 그릇이 발견되는 등 사망 원인이 분명한데다가 가족이 검시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둑 누명은 벗을 수 있지만 성추문은 씻기 어렵다”

『심리록(審理錄)』을 분석해보면 정조 재위 기간 중 발생한 38건의 자살사건 중 거의 대부분인 31건이 여성의 자살이었다. 국왕에 보고된 사건이 이 정도였으니, 실제로는 당시 훨씬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 중에는 앞서 유씨부인의 예에서 보듯이 성추문이 있었다. 사실 조선의 농촌사회에서 이웃에 퍼진 추문은 죽음을 불사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한국법제사를 연구한 미국의 법학자 고(故) 윌리엄 쇼(William Shaw) 교수가 1981년에 『심리록』 판례를 분석하면서 ‘소문의 역할(The role of gossip)’ 항목을 별도로 설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 서산 유씨부인 사건 한 해 전인 1898년에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 독정리에서 발생한 인명사건의 검안. 다만 본 사건은 성추문과는 관계가 없다. 일찍 부모를 여윈 고여인이 생활고로 인해 도둑질을 하다 적발된 후 간수를 마시고 자살한 사건이다. 규장각 소장.
▲ 서산 유씨부인 사건 한 해 전인 1898년에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 독정리에서 발생한 인명사건의 검안. 다만 본 사건은 성추문과는 관계가 없다. 일찍 부모를 여윈 고여인이 생활고로 인해 도둑질을 하다 적발된 후 간수를 마시고 자살한 사건이다. 규장각 소장.

비단 앞의 유씨부인 외에도 불륜, 간통에 대한 주위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힘든 고통으로 느껴 극단적 선택을 한 여성들의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1780년(정조 4) 경기도 수원에서는 황성욱(黃成郁)의 첩 윤여인이 정처 정여인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기 위해 박무신(朴戊申)이란 자를 사주하여 밤에 정여인의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추문을 퍼뜨리기 위한 윤여인의 계획은 성공하였고, 결국 윤여인은 수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간수를 마시고 생을 마감한다. 또한 1786년(정조 10) 경기도 여주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강취문(姜就文)이란 자가 이웃 여성 김판련(金判連)에게 장가를 가기 위해 판련이 자신과 이미 간통한 사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판련이 간수를 마시고 자살한 것이다.

세상에서 뼈에 사무치는 억울하고 분한 일은 정숙한 여인에게 음란한 행실이 있다는 모함이다. 이러한 오명을 한번 뒤집어쓰면 곧 만길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심리록』, 김은애 사건의 정조 판부(判付) 중에서)

정조가 거짓으로 자신의 불륜 소문을 퍼뜨린 노파를 잔인하게 살해한 전라도 강진의 김은애를 변호하면서 한 말이다. 다산 정약용 또한 성추문 대상자로 한번 지목되면 모든 사람이 믿어버려 되돌리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도둑 누명은 벗을 수 있지만 성추문은 씻기 어렵다’는 속언(俗諺)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처럼 극한의 억울함과 분노 속에서 안타깝게도 일부 여성들의 최종 선택지가 바로 간수를 이용한 음독자살이었음을 우리는 조선시대 사건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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