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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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10.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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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18강>_ 김헌 서울대 HK교수의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18강 김헌 교수(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헌 교수는 “뒤를 이어 탄생한 모든 작품들의 압도적인 모델이 된” 서양 문학사 “최초의 문학 작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지” “하나의 독법을” 소개한다. 그를 위해 먼저 호메로스만의 독특한 서사 방식을 살피는데 호메로스가 ‘사건의 한가운데로(in medias res)’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서사의 핵심을 가장 또렷하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탁월성”을 보였으며 그렇듯 사건의 한가운데로 육박해 들어감과 동시에 “관련 사건들을 취사선택하여 짜임새 있게” 엮어내는 데서 그 천재적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평한다. 그리고 스토리와 관련해서는 “필멸하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길 원한”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을 통해 “불멸의 명성이라는 것도 우리의 삶이 유한하고 필멸하는 것이기에” 빛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였다고 말한다.

▲ 지난 9월 5일, 김헌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9월 5일, 김헌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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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에 완성된 프랑스의 화가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의 작품 「호메로스의 신격화(L’Apothéose d’Homère; Homère déïfié)」는 서구 문화의 큰 특징 하나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 앵그르, 「호메로스의 신격화(L’Apothéose d’Homère; Homère déïfié)」 출처 –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열린연단
▲ 앵그르, 「호메로스의 신격화(L’Apothéose d’Homère; Homère déïfié)」 출처 –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열린연단

우아한 이오니아식 기둥의 신전을 배경으로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호메로스가 앉아 있다. 신전 박공(pediment) 아래 코니스(cornice)와 아키트레이브(architrave) 사이 프리즈(frieze)에 그의 이름 ‘호메로스’가 그리스어 대문자로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이제 그의 머리에 여신이 월계관을 씌워주는 장엄한 대관식이 거행되는 것이다. 그 여신은 일견 음악과 문학의 여신 무사(Mousa) 같지만, 승리의 여신 니케(Nikē)라는 설명도 있다. 여신이 정확히 누구이든, 어쨌든 대관식의 주인공인 호메로스는 서양 문화의 최고봉임은 시각적으로 분명하다. 빨강과 초록 옷을 입은 두 여인의 아래 계단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만약 호메로스가 신이라면, 나는 그를 불멸의 신들 사이에 있게 하리라. 만약 신이 아니라 해도, 나는 그를 신이라 생각하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그의 주변으로 42명의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서구 문화를 이끈 주요 인물들이다. 전설적인 가수 오르페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음악 교사인 리노스, 서사시 분야에서 그의 뒤를 이은 헤시오도스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이탈리아의 단테를 비롯해서 3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메난드로스와 근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등도 보인다.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우화 작가 이솝,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조각가 페이디아스, 그리스의 화가 아펠레스, 그리고 르네상스의 화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도 보이며, 음악가 모차르트도 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페리클레스, 데모스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등 주요 정치적 인물들도 보인다. 그들이 경탄과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가운데 호메로스 신격화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호메로스가 서구 문명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상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의 발밑에 두 여인이 앉아 있다. 그가 남긴 두 편의 서사시를 의인화한 것이다. 빨간 옷의 여인 옆에는 칼이 놓여 있고, 초록 옷의 여인의 허벅지에는 노가 기대어 있다. 빨강과 칼은 전쟁을, 초록은 바다, 그리고 노는 항해와 모험을 의미한다. 두 여인이 각각 어떤 작품인지를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초록의 여인은 모험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이고, 빨강의 여인은 전쟁의 서사시 『일리아스』이다. 앵그르는 친절하게도 두 여인이 앉아 있는 층계에 그리스어로 작품 이름까지 새겨넣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크노(Raymond Queneau, 1903-1976)는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은 『일리아스』거나 『오디세이아』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을 수긍한다면, 서양 문학사는 최초의 문학 작품이 그 뒤를 이어 탄생한 모든 작품들의 압도적인 모델이 된 역사인 셈이다. 이렇게 두 작품은 서구 문학사의 틀을 결정한 ‘문화 정전’이다. 앵그르는 호메로스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극단적인 존경을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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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두 작품은 독특한 서사 방식으로 시작한다. 시인은 무사 여신을 부르고, 자신이 불러야 할, 그리고 청중/독자가 듣고 싶어 하는 부분을 꼭 찍어서 노래하고 말하라고 요청한다. 그 요청은 명령으로 표현된다. 시인은 청중 앞에서 무사 여신을 부르면서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가 나뉘어 있음을 즉각적으로 그려냄과 동시에, 자신이 천상의 무사 여신과 직접 통하는 특별한 존재임을 천명하는 셈이다. 특히 명령법의 구사는 시인의 권위를 충격적으로 부각한다.

무사 여신은 청중과 인간을 대표하여 당당하게 요구하는 시인에게 기꺼이 화답하며 시인에 빙의(憑依)한다. 이제 시인은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인간 호메로스가 아니라 무사 여신으로서, 그녀를 대신해서 인간들에게 감추어졌던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듯 노래한다. 인간의 대표자였던 시인은 이제 청중과는 구별되는 신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천상의 목소리를 지상의 인간에게 전하는 존재가 된다. 영웅들이 반신반인의 태생적 이유로 지상에 살면서도 영원한 신들의 세계를 갈망하는 중간자적 존재이듯, 시인은 이제 이원론적인 세계를 잇는 예언자/선지자적, 제사장적 매개자가 된다.

그런데 왜 하필 무사인가? 무사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이며 그 아버지는 천하를 지배하는 제우스이다. 따라서 둘 사이에 태어난 무사는 ‘최고의 권위를 갖춘 기억’이라는 유전자적 특징을 갖는 셈이다. 게다가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압하고 권력을 쥐었는데, 크로노스(Kronos)는 통상 시간(Khronos)의 신으로 여겨지니, 제우스의 권력은 시간에 흐름에도 약화되지 않고 튼튼하게 영원하다.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가진 무사 여신의 기억 또한 시간의 흐름에 지워지지도 퇴색되지도 않는 영원한 또렷함을 담보한다. 그런 무사를 부름으로써 시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노래에 신적인 권위와 영원한 진실성을 부여하며 노래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시인의 노래에 감히 진실성을 의심하며 시비를 걸지 말라는 사전 봉쇄의 시학적 장치다. 학설이나 주장, 서사와 이야기에 자신만의 ‘무사’를 부르고 그에 의존하는 관례의 뿌리와 원형은 호메로스가 창안한 것이다. 그의 후계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그를 답습하면서 ‘무사’를 부르는 방법은 서구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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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천재성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지만, 서사의 핵심을 가장 또렷하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탁월성에서 부각된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런 재능을 ‘사건의 한가운데로(in medias res)’라고 표현하였다. 실제로 호메로스는 두 편의 서사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를 작품의 맨 처음에 배치했다.

『일리아스』는 “메닌(mēnin)”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진노”라는 뜻이다. 『일리아스』는 그야말로 진노의 서사시다. 그리고 그 진노가 아킬레우스의 진노임을 명확하게 천명하면서 시인은 그 진노의 현장으로 거침없이 돌진한다. 그 현장은 10년째 지속되고 있는 트로이아 전쟁의 현장이며,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막사다.

호라티우스의 말대로 “호메로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노래하면서 쌍둥이 알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곧장 결말을 향하여 나아가며 지금까지 사건이 어떻게 경과했는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청중을 ‘사건의 한가운데로(in medias res)’ 곧장 이끌어간다.” 서론이 길지 않고 군소리 없이 본론으로 단도직입한다는 뜻이다.

『일리아스』의 “진노”가 그랬듯, 『오디세이아』도 작품의 첫 단어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면서 방만한 작품에 통일성을 잡아주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첫 단어는 “안드라(andra)”, 즉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작품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10년의 우여곡절을 겪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임을 첫 단어가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를 고생하게 만들고 그를 붙잡아두고 그를 귀향하게 하는 신들이 있지만, 『오디세이아』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이야기, 신화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렇듯, 작품 전체를 꿸 수 있는 단어를 과감하게 작품의 첫 단어로 선택한 호메로스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에두르지 않고 핵심으로 직진하며,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활활 솟구치는 불꽃을 단숨에 드러내며 청중과 독자의 감탄과 충격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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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의 이야기 짓는 솜씨가 왜 탁월한가를 탐구했다. 그 결과가 『시학』에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서사시든 비극이든 아름다운 구조로 짜인 이야기는 통일성을 가져야 하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 완결된 행위에 관해 구성되어서 마치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생명체처럼 고유한 쾌감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23.1459a17-21) 이런 기준에 맞춰본다면, 호메로스는 어떤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트로이아 전쟁 전체를 마치 역사를 기술하듯 시간의 순서를 따라가면서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나열하는 대신, 전쟁의 10년째 되는 해 며칠 동안에 초점을 맞춰 “아킬레우스의 진노”에 관해 이야기를 집중시켰고, 탁월한 솜씨로 전쟁의 다채로운 전모를 적절하게 끼워넣어 전체의 완결성을 높였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이다. “사건의 한가운데로” 가면서 관련 사건들을 취사선택하여 짜임새 있게 엮어낸 것이다.

『오디세이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되, 이야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호메로스는 잘 알고 있었고 탁월하게 구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고 해서 이야기가 저절로 통일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중에 어떤 것들은 서로 긴밀한 상관이 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라는 한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성공적으로 이야기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호메로스의 탁월성은 사건들을 취사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뺄 건 빼고 남은 사건들을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인과 관계로 긴밀하게 엮어 주제를 부각하고 이야기에 통일성을 부여한 솜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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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탁월한 솜씨로 통일성 있게 조직한 결과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주인공의 실명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사람을”(혹은 “남자/사나이를”: andra) 말해달라고 무사 여신에게 요청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디세이아』는 세상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이 베일을 뚫고 나와 사람들의 기억을 일깨우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름이 감추어진 ‘사람’이 자신의 이름 ‘오디세우스’를 회복하고 천명하는 이야기이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인데, 그 뜻이 무색하게 오디세우스는 시작부터 감추어져 있다.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에게 잡혀 있지만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신들의 결정이 내리지는 장면 이후, 1권의 나머지 부분부터 4권까지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이다. 5권에 가서야 오디세우스가 비로소 등장한다. 세상으로부터 감추어진 그가 그를 감추고 있던 곳을 빠져나오는 장면으로부터 마침내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도 마찬가지다. 10년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한 그는 그가 죽었다고 믿는 구혼자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한다. 자신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108명이나 되는 불한당들에게 제거될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작품의 절반에 해당하는 13권부터 24권까지는 집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가 이름을 감추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마침내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대반전의 결말로 질주한다.

이렇듯 『오디세이아』는 ‘사람’으로 가려져 있던 주인공이 그의 실명을 회복하여 ‘오디세우스’로 드러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새겨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던 영웅들의 이야기인 『일리아스』와 맥이 통한다. 오디세우스 역시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는 ‘일리아스의 영웅들’과 같은 가치관과 지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안락한 망각의 낙원, 달콤한 칼립소의 품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벅적이고 위험천만한 세상으로 회귀하여, 그리던 고향에 돌아와 불한당들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왕궁을 되찾아 그 이름을 빛내는 영웅으로 우뚝 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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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반드시 죽고 말 필멸의 세계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가 영원한 젊음과 쾌락이 보장된 곳을 버리고 남루한 인간의 땅으로, 가사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런데도 오디세우스는 영생을 얻을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굳이 필멸의 세계, 그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모두 영원을 갈망했다. 모든 존재가 존재를 지속하려는 것이 본성인 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영원에 대한 지향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그 답을 불멸의 명성에서 찾았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 전쟁에서 빠져 편안하게 오래 살다가 죽지만 잊혀지는 삶보다는, 전쟁에 참가하여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불멸의 명성을 얻는 삶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어차피 죽는다면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로 남겠다는 것, 그것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자기 존재를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에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신적인 조건 안에서 영생하는 것보다는 필멸하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길 원한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선택에는 보잘것없이 초라해 보이는 필멸의 인간 조건에 대한 긍정과 깊은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왜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안전한 귀향을 모색하던 오디세우스가 하데스까지 내려가 이루어진 아킬레우스 혼백과의 만남이다. 오디세우스가 보기에 죽은 아킬레우스의 혼백은 행복해 보인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추앙했는데, 사후 세계에서도 강력한 통치자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사후 세계인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곳’을 뜻한다. 지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뜻이다. 오디세우스를 감추던 칼립소와 뜻이 일맥상통한다. 존재의 그림자로, 희멀건 한 혼백으로 머물러야 하는 하데스를 떠나고 싶어 하는 아킬레우스나,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는 칼립소를 떠나고 싶어 하는 오디세우스가 지향하는 곳은 결국 같다. 고통스럽고 유한하며 언젠가는 죽음으로 끝나야 하는 곳, 바로 우리의 지상이다. 영원한 것보다는 유한한 것에 대한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불멸의 명성이라는 것도 우리의 삶이 유한하고 필멸하는 것이기에 빛나며, 영원에 대한 갈망조차도 유한한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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