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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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에 대하여
  • 김건우 해외통신원/빌레펠트대학 박사과정·사회학
  • 승인 2020.09.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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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에세이_ 서평: 『정치적 낭만주의』 (칼 슈미트 지음, 조효원 옮김, 에디투스, 260쪽, 2020.08)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

1. 『정치적 낭만주의』의 상황

국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는 『일반국가학』에서 국가를 ‘기관’ Anstalt으로 이해하는 것의 미발전에 대해서 기관개념은 전체 법학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개념에 속한다고 말한다.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비판과 위기』가 어떤 맥락에 놓였는지 설명하면서, 애초의 계획은 칸트의 세 개의 비판이 갖는 정치적인 기능들을 준거 삼아 절대주의, 18세기의 계몽주의와 20세기의 유토피아적인 이념의 연관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독일 학자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그 예비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정치적 낭만주의』의 첫 문장을 “독일인들은 쉽고 편한 한마디 말로 어렵지 않게 소통하는 경쾌함이 부족하다.”고 쓰고 있다. 그의 정치적인 문제의식에서 낭만주의야말로 독일의 문화과학 전반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개념이자, 그 개념이 갖는 정치적인 연관이 역사적으로 파괴적이고 치명적이어서 예비단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정신사적 미궁 속으로 함몰되어 낭만주의가 “하나의 실재에서 다른 실재로 계속 도피하는” 기연주의가 되어버린 그 상황에서 슈미트는 시대에 부합하는 형식을 모색하고자 한다. “어떤 시대도 형식 없이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투쟁의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치적 낭만주의』는 1919년 출간되었다. 슈미트가 31살 때이고, 제1차 세계대전 직후다. 이른바 ‘1914년 정신’으로 불리는 보수혁명과의 비교 속에서 슈미트의 보수주의의 특이성과 급진성을 검토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런 정신사적인 배경 속에서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슈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사강사로 형법을 가르치고 있던 시절의 작업이기도 하다. 연구자에 따라 인간주의적인 교양의 시기를 넘어서 프로이센적인 것의 각인과 신칸트학파의 영향 속에 있던 시기라고 평가되는 이 시기는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20년대의 슈미트, 즉 정치신학의 이론가로서 슈미트의 ‘전사’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정신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매우 예리하게 반응한 젊은 법학자가 젊은 시절 문화와 교양의 세계가 붕괴된 현실에 직면하여 ‘독일적인 것’을 해명하기 위한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낭만주의의 정신사를 탐색하면서 그 정신의 구조를 분석한다. 정치적 수동성과 무능력을 갖는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정치적인 주체는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낭만주의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젊은 시절 전 영역에 걸쳐 획득한 최고수준의 문화적인 교양을 향유한 하나의 결산이기도 하고,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정치적인 저작들의 가교라고 저작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이 저작의 서술은 가령 1922년의 『정치신학』이나 1923년의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처럼 간결하고, 투명하지 않다. 오히려 1921년 출간된 『독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유럽의 역사에 수반된 정신사적인 개념들을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가능한 많은 이론가들과 저작들을 상당히 자유롭고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하나의 문장으로 응축되는 사고의 준비과정까지도 독자에게 그대로 전시하는 일종의 무대장치 ‘Kulisse’가 된 것 같은 이 복잡하고 난해한 지적인 곡예는 “낭만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선이 아니라 아라베스크 무늬다.”라는 그의 문장을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린다. 『정치적 낭만주의』는 하나의 아라베스크 무늬같은 책이다. 즉, 정치적 낭만주의를 개념적으로 해명하고 비판하기 위한 이 작업에서 독자는 낭만주의의 흔적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슈미트 특유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는 사고와 이를 수행하는 문장들이 정치적 낭만주의의 ‘정신사적 미궁’ 속에서 독자를 안내하는 명료한 이정표가 된다. 이러한 지적인 두께는 역자의 노고가 소중한 이유들 중 하나다.


2. 낭만주의 정신의 구조

낭만주의는 중세나 아련한 교회의 종소리, 석양, 달빛, 오래된 성, 선한 농부 등과 같은 대상이 야기하는 감각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성을 통해서 개념화될 수 없다. 슈미트는 이를 전도하여 낭만주의적 주체를 말한다. 세계와 맺는 특수한 관계를 통해 신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낭만주의적 생산성을 산출하는 주체가 문제가 된다.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무수한 이론가들, 특히 아담 뮐러가 호명되어 분석되는 이유다. 이제 낭만주의는 ‘주관화된 기연주의’ subjektivierter Occasionalismus가 된다. 낭만적인 것 안에서 낭만주의적 주체는 자신의 낭만주의적 생산성을 위해서 세계를 계기와 기회로 삼는다. 계기, 기회 또는 우연 등의 표상으로 대신할 수 있는 개념이 말브랑슈의 ‘기연적 원인’ causes occasionnelles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연’ occasio이다. 낭만주의적 생산성으로 세계를 낭만화하는 낭만주의적 주체는 이제 ‘원인’ causa 개념을 부정하고, 계산 가능한 인과성의 강제 역시 거부한다. 기연주의는 하나의 실재에서 다른 실재로 계속 도피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다른 것, 낯선 것은 참된 것을 찾아 ‘더 높은 제 삼자’ 속에서 통일하고자 한다. 낭만주의적 주체는 이렇게 세계의 창조자가 되고, 낭만주의의 주관화된 기연주의는 신조차 주관화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

▲ San Casciano: 칼 슈미트 생가
▲ San Casciano: 칼 슈미트 생가

주관화된 기연주의를 따르는 낭만주의자들에게는 현실이 무한한 점들로 미분화되어 순간순간이 하나의 구성점이 된다. 점이 동시에 하나의 원이고 원이 동시에 하나의 점일 수 있는 것처럼 원의 응축으로서 점, 점의 확장으로서 원이라는 응축하기와 확장하기로 낭만주의는 세계를 구성한다. 세계의 해체이기도 한 이 낭만주의적인 놀이 안에서 실체적인 현실과 구체적인 현상은 역자가 작년에 번역 출간한 『정치신학 2』의 문제의식을 빌리면, ‘처리’ Erledigung된다.

3. 정치적 낭만주의

의적은 낭만적 형상은 될 수 있지만, 그가 낭만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세는 낭만화된 복합체이지만, 그 자체로 낭만주의적이지 않다. 주관화된 기연주의를 고려할 때 중요한 것은 낭만주의적인 주체와 그 활동뿐인데, 이는 자유주의적인 시민 세계를 무대로 한다. 오직 자신의 체험만이 중요하고 흥미롭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질서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시민적 안정성’ Sekurität을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낭만주의를 규정하는 ‘아이러니’는 정치적 낭만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예들 들면 독일 낭만주의가 처음에는 혁명을 낭만화했지만, 이후 지배층의 복고 체제를 낭만화하고, 1830년대 이후에는 다시 혁명적인 사상이 된 것에서 볼 수 있는 ‘아이러니한 전도’는 정치적으로 혁명적이든 반동적이든, 전투적이든 평화적이든, 이교도적인 것이든 기독교적인 것이든 그와 무관한 정치적 내용의 가변성에 의한 것이다. 기연주의적 태도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이는 그 수동성을 핵심으로 한다. 정치적인 현실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직접 참여해서 변화시키고자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없으며,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주권적인 결정을 하지 못하고 언제나 ‘더 높은 제삼자’를 통해 대립을 대체하면서 현실에서 도피한다. 기연주의적인 도피는 구체적인 질서 속에서 문제로 출현하는 정치적인 현실에 대해 ‘절대적인 수동성’을 야기할 뿐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가질 수 없는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정치적 현실은 “국가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며, 역사적-정치적 현실 속의 국가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낭만적 주체의 창조적 활동을 위한 기연, 즉 시와 소설 혹은 순전히 낭만적인 기분을 위한 계기”가 될 뿐이다. 정치적인 주체와 정치적인 활동은 낭만적 감정들의 연결점이라는 기능을 할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주관화된 기연주의를 따르는 낭만주의자들의 다양한 문화적인 활동에서의 활동성과 정치적 활동성 간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낭만주의적 생산성과 낭만주의적 활동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맥락 속에서 객관화할 수 있는 정치적인 역량이 없다.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은 결정하지 못하며, 또 명령할 수도 없다. 슈미트적인 진리의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다. “정치적 활동이 시작되는 곳에서 정치적 낭만주의는 멈춘다.”

4. 『정치적 낭만주의』와 정치적 형식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더 높은 제 삼자’를 통해 종합하고 지연시킬 수 있는 정치적 낭만주의자에게 모든 것은 미학적 형상화를 위한 질료일 뿐이다. 낭만적 감정들을 아무리 연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상적인 것’을 개념화하지 못한다. 논리적 구별도, 도덕적 가치판단도, 정치적 결단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정치적 생명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법에 대한 믿음과 불법에 대한 분노가 그에게는 없다.” 1914년의 저작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의미』의 슈미트도, 1922년 『정치신학』과 23년 『오늘날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로마 카톨릭주의와 정치적 형식』의 슈미트도 모두 다양한 형식으로 『정치적 낭만주의』에 들어있다.

▲ Kai nomon egnō (und er erkannte den Nomos) – Grabstein Carl Schmitts auf dem katholischen Friedhof Plettenberg-Eiringhausen
▲ 칼 슈미트 묘비석

이 저작이 인과성의 문제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정치적인 차원으로 전환한 ‘세속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는 ‘기능’ 개념을 보유하고 있는 사회학에서도 역시 중요하며 개념적인 폭발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법학자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루만이 슈미트에 대해서 ‘개념사가’로 평가한 것도 전투적이고 많은 논쟁을 야기한 이 저작을 통해 검토해볼 수 있다. 정치적 낭만주의자에게 “공동체는 확대된 개인이며, 개인은 응축된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슈미트의 지적처럼 낭만적인 법이나 낭만적인 윤리는 사회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규범은 “낭만적인 것의 기연적인 방종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개념상 정상적인 것은 낭만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상과 규범,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구별 그리고 질서의 문제는 곧바로 사회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법학자 슈미트가 낭만주의에 대해 그러했던 것과 달리 근대사회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문턱 앞에 멈춰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성의 정신사적인 측면과 근대사회의 역사성과 정치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저작이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인 질서에 대한 정신사적 투쟁이라면 그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근대사회에 대한 일반 이론이 요구된다. 『정치적 낭만주의』가 보수혁명을 넘어선 저작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완의 저작인 이유들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이후 서구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적인 운동으로 등장한 낭만주의를 정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 저작을 우회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등장한 찬란한 사유들을 모두 꿰어 거기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탁월한 솜씨의 매우 정치적인 이론가 칼 슈미트를 마주하게 된다. 그에게 정치적 낭만주의는 그 자체로 서구 근대성의 운명의 문제였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낭만주의처럼 매우 복잡한 현상을 그에 상응하게 매우 복잡하게 사고하고, 구체적인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슈미트에게는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실재하는 것을 넘어선 어떤 것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이 시대의 형이상학의 정치적인 무능력을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1931년의 『헌법의 수호자』 서문에서 슈미트는 “험악한 상황과 새로운 통치는 나를 이렇게 생각하게 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현실과 현상의 구체적인 특성에 대해 보다 더 명확하게 정치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슈미트의 이념이다. 1919년의 『정치적 낭만주의』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은 다만 진지하게 제기된 한 가지 질문에 대해 실제적인 해답을 주고자 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두 저작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 있는 것을 넘어 슈미트가 세계와 질서를 사고하는 중요한 양식을 확인하게 된다. 매우 절박한 상황이어서 단 하나의 질문이 중요했고, 그 철저함을 위해 단지 몇 개의 개념들만 필요했다. 질서를, 대지의 노모스를 구체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슈미트의 과거의 지적인 결산과 미래를 위한 예비작업을 『정치적 낭만주의』는 증언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어떠한 정치적인 형식을 필요로 하는가, 또 우리는 그런 형식을 현실화할 수 있는 집단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가.


김건우 해외통신원/빌레펠트대학 박사과정·사회학

현재 독일 빌레펠트 대학 사회학과에서 사회학이론과 국가사회학을 연구 중이다. 칼 슈미트와 니클라스 루만의 국가와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교수신문> 독일 통신원을 지냈고, 루만과 부르디외, 최인훈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썼다. 퇴니스의 논문 [법치국가와 복지국가]를 옮겼으며, 루만의 [근대의 관찰들]과 [체계에서의 권력]을 번역 중이다. 사진은 마키아벨리를 따라 San Casciano라고 이름을 붙인 플레텐베르크 슈미트의 생가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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