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깨달음,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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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깨달음, 어렵지 않다.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0.09.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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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학문은 깨달음을 갖추어야 한다. 깨달음을 갖추면 학문을 즐겁게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학문이 마지못해 하는 고역이다.  학문이 즐겁다고 하면 고역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쪽에서는 위선이라고 헐뜯는데, 제대로 하는 학문의 즐거움은 다른 어느 것보다 크다.

깨달음을 갖추지 못한 학문은 하기 힘든 것만 문제가 아니다. 사이비 학문이어서 쭉정이이거나 속임수이다. 쭉정이는 자기를 허탈하게 하기나 하지만, 속임수는 세상에 해를 끼친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기고 갑질을 일삼으면서, 속임수로 학문을 방해하는 교수가 늘어나는 사태가 심각하다. 깨달음을 갖춘 학문을 하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다.

학문의 깨달음은 어떻게 하면 이루어지는가?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댈 곳을 찾자. 불교의 깨달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얻을 것이 있고, 반면교사라고 여기면 더 유익하다. “다 깨달았는데 뭘 더 공부한다는 말인가?” 어느 고승이 말했다. 공부의 요체가 깨달음이라고 했다면 전적으로 타당하다. “다 깨달았는데”라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어, 불교와 학문이 갈라진다.

불교에서는 한꺼번에 다 깨달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학문은 거듭 깨닫는 과정이다. 완성이란 있을 수 없고 계속 나아간다.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유한한 노력이 학문이다. 먼저 깨닫고 나중 깨닫고, 더 깨닫고 덜 깨닫고, 크게 깨닫고 작게 깨달은 것이 모두 소중해, 차등을 이루지 않고 대등하다.

불교의 깨달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가까이서 살펴보자. 말이 되지 않은 말을 화두(話頭)로 삼아 마음을 모으고 조용히 앉아 참선을 하면, 마침내 시비분별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있음이 없음이고 없음이 있음”(色則是空 空則是色)이라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학문의 참선은 일정한 방법이 없다. 어디서 언제든지 해도 된다. 시끄러워도 가능하고, 잠잘 때 큰 소득을 얻기도 한다. 대화하고 토론하면 많은 진전을 이룬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오래 궁리하고 끝까지 추구하면, 어둠을 헤치고 한 소식 들려올 수 있다. 문제의식과 집중력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다른 요건을 잡스럽게 추가해 논의를 흐리지 말아야 한다.

한 소식이 어떻게 오는가?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원근 산천의 진면목이 드러나듯이,  아무 관련이 없다고 여기던 것들이 서로 이어진다. 막혔던 물이 힘차게 흐르고 붉은 해가 솟아오르듯이, 숨어 있던 구조가 나타나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내 마음 어딘지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라고 시인이 노래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을 무어라고 일컫는지 정해진 말이 없다. 새로운 명명을 해야 발견한 것이 형체를 가지고, 창조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은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해, 참고로 삼을 수 있게 한다. “상생(相生)이 상극(相克)이고, 상극이 상생인 생극(生克)의 원리”가 다가오는 것을 학문을 하는 지침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계속 뻗어나는 연구를 아주 신명나게 한다.

“있음이 없음이고, 없음이 있음이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괄하는 총론이기만 하므로 각론은 필요로 하지 않다. 침묵하는 것이 가장 고귀하다. “상생이 상극이고 상극이 상생이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론이면서 개개의 사실을 실상에 맞게 논의하는 각론이다. 총론을 크게 열고 각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하면 가만있을 수 없고, 새로운 탐구를 계속해서 창조의 성과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연구거리가 봇물처럼 쏟아져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

불교에서는 돈오(頓悟)의 깨달음을 얻은 다음, 깨달은 바를 분명하게 하는 점수(漸修)를 해야 한다고 한다. 학문에서도 젊어서 돈오한 바가 있어야 평생 점수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둘의 관계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이다. 더 알아보면, 돈오와 점수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얻은 것 없이 점수만 하다가 예상하지 않은 돈오를 할 수도 있다. 돈오한 것을 점수하다가 더욱 진전된 돈오를 하는 것이 예사이다.

뒤의 경우에 관해 더 말해보자. 이미 돈오해 깨달은 것을 가지고 점수하느라고 많은 수고를 하고 있을 때, 차원 높은 돈오가 새로 나타난다. 그 덕분에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고, 난관에서 비약이 이루어진다. 이런 놀라운 일이 계속 일어난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이럴 수 있다. 학문이 젊음을 되찾게 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고승을 높이 받들고 우러러본다. 깨닫는 것이 아주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학문의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문제의식과 집중력을 갖추고 성실하게 노력하면, 정성이 비약으로 바뀌어 나타나는 작은 기적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칠 수 있으니 다잡아야 한다. 한고비 넘어가면 깨달음의 즐거움이 폭발하듯 닥치는데, 학문은 괴롭기만 하다고 여기다가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 않아 안타깝다.  

사람은 누구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학문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학문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갖춘 학문을 해야 스스로 즐겁고, 좋은 결실을 얻어 남들에게 나누어주며 널리 유익한 봉사를 한다. 좋은 길을 버려두고 왜 구태여 고역을 택해, 자기도 세상도 괴롭게 하는가?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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