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녹수를 양성한 제안대군은 어리석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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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를 양성한 제안대군은 어리석었을까?
  • 하응백 문학평론가/소설가
  • 승인 2020.08.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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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인문학으로 읽는 국악이야기: 민요라는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인문학으로 풀어내다』 (하응백 지음, 휴먼앤북스, 300쪽, 2020.06)
             
저자에게 자신이 쓴 책에 대해 소개를 하라고 하면 자화자찬이나 비분강개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쓴 책이니 객관적인 거리두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동양적 겸양지덕 차원에서, 졸저(拙著) 어쩌구 하면서 겸손만을 늘어놓는다면 그것 또한 꼴불견이긴 마찬가지다. 그럴 거면 왜 책을 냈나, 하는 반감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이야기 하나를 늘어놓자.

흔히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으로 연산을 꼽는다. 연산의 혼을 빼놓은 여자는 장녹수로 알려져 있다. 흥미 위주의 드라마나 소설에서 장녹수는 연산에게 섹스어필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대단한 미모의 여인일 것 같지만 실제 장녹수는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출중한 미인은 아니었다. 장녹수는 가무(歌舞)를 익혀 오히려 노래의 명성이 장안에 자자했다. 『연산군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신윤복의 주유청강
▲ 신윤복의 주유청강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연산군일기]』 1502년 11월 25일)

이 기사를 보면 장녹수가 어떤 인물인지 잘 드러난다. 장녹수를 훈련시켜 노래하는 여인으로 만든 이가 바로 제안대군이다. 제안대군은 조선 8대 임금 예종의 장남으로 예종이 20세의 나이에 죽자 왕위 계승 1순위였으나, 성품이 어리석고 어리다는 이유로 사촌 형인 성종이 보위에 올랐다.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 대신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성종은 한명회의 사위였다. 때문에 제안대군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과 함께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월산이나 제안이나 모두 자신들의 할아버지 세조가 단종을 어떻게 죽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 신윤복의 청금상련
▲ 신윤복의 청금상련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이 살기 위해 달려간 곳이 바로 풍류의 세계, 요즘말로 하면 국악의 세계였다. 월산대군이 지었다고 하는 시조 한 수가 남아 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가노매라
 
가을밤 낚시를 했다. 고기가 물지 않아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애당초 고기를 잡을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기 욕심도 없으니 물욕도 없고 정치 욕심도 없다. 사실이 그랬다기보다 그렇게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런 시조를 지어 동네방네 소문을 내야 한다. 그렇잖아도 당시 시조는 노래의 가사였다. 문학작품으로 시조를 짓는 것이 아니라 노래가사로 짓고, 그것을 장녹수와 같은 소리 기생이 노래(가곡)로 불렀다. 그래야 더욱 소문이 난다. 이때 음악 반주는 아마도 제안대군이 담당했을 수도 있다. 제안대군은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다만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연주하기를 좋아”하였다고 하니 충분히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은 사촌간이고 처지도 비슷하니 자주 만났을 가능성도 많다.

제안대군은 공들여서 사설 가무단을 만들어 놓고, 음률을 가르치고 가곡 반주를 하고 스스로도 즐겼다. 그중에 장녹수가 가장 뛰어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색으로 정치를 망쳤던 연산이 그 소문을 놓칠 리가 없다. 연산은 제안대군에게서 장녹수를 빼앗아 갔다.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제안대군의 집을 일종의 기생양성소(가흥청, 假興淸)로 만들어 뇌영원(蕾英院)이라 부르게 할 정도였다. 연산은 제안대군의 예기(藝妓) 양성의 실력을 인정하고 의지했다.

장녹수는 연산을 가지고 놀았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으니,”(『연산군일기』, 위와 같은 곳) 어찌하랴! 연산은 장녹수와 함께 점점 파멸의 길로 들어서 4년 후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그해 강화도에서 죽었다. 

연산의 폐위 뒤에도 제안대군은 건재했다. 연산에게 장녹수를 공급한 것은 죄로 다스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왕족으로서 온갖 특권과 호사를 누렸다. 자신을 대신해 왕이 된 성종보다, 성종의 아들 연산보다 더 오래 풍류를 즐기면서 살았고, 1525년 나이 육십에 돌아가셨다.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다. 제안대군 이현이 죽자 사관(史官)은 그의 일생을 이렇게 논평했다.

이현은 예종(睿宗)의 아들로 성격이 어리석어서 남녀 관계의 일을 몰랐고, 날마다 풍류 잡히며 음식 대접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나 더러는 행사가 예에 맞는 것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짓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1525년 12월 14일)

조선왕조실록에서 사관이 논평할 때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내용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일종의 수사법이다. 그러니 진실은 제안대군이 평생을 어리석은 체하며 접대와 풍류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풍류, 즉 성악과 사죽관현의 예술세계가 아니었으면 제안대군의 인생은 퍽 불쌍할 뻔했다. 여색을 멀리했기에 풍류만이 그를 구원했다.

하응백의 『인문학으로 읽는 국악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 찬, 그런 재미있는 책이다.


하응백 문학평론가/소설가

문학평론가, 소설가, 국악 연구자이다. 경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91년 서울 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비평집 『문학으로 가는 길』(1995), 『낮은 목소리의 비평』(2000) 등을 냈고, 최근 소설 『남중』(2019)을 출간해 호평을 받았다. 국악 관련 책으로는 국악 노랫말을 해설, 주석을 단 『창악집성』(2011)을, 국악 연구서인 『놀량사거리 연구』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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