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인문학은 분과학문의 통합이며, 나와 대상의 존재론적 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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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인문학은 분과학문의 통합이며, 나와 대상의 존재론적 통합이다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8.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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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통합인문학을 위하여 |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170쪽

국문학자 박희병의 통합인문학에 대한 40여년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흔히 인문학이 위기라고들 한다. 이 책은 인문학의 위기가 무엇이며, 왜 초래되었는지를 따지는 데서 시작한다. 인문학 위기 담론이 대두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인문학’이라는 담론은 한국 사회의 대유행 담론이 되어버렸다.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거리의 인문학·커피의 인문학·희망의 인문학·시민 인문학 등등 인문학 앞에 온갖 수식어가 나붙었다. 이쯤 되면 인문학이란, 어떤 학문이라기보다는, 좋게 봐야 고급 교양일 뿐이다. 이처럼 인문학이 위기라고 말하는 현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은 한국 사회에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사실 인문학은 원래 가난한 학자들이 수행한 학문으로 애당초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늘 ‘위기’였다. 현재 사람들이 말하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대학 학생들이 졸업 후 취업이 덜 되는 것과 큰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대학 학과의 위기’요, 밥벌이의 위기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현재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을 〈정량 평가의 문제〉로 본다. 학자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논문은 그 질적 가치로 평가되어야 하지만, 현재 한국의 시스템에서는 질보다는 양이다. 그 결과, 학자는 스스로의 내면적 요구, 스스로의 지적 갈증 때문에 연구하고 논문을 쓰기보다는, 논문 쓰기에 적절한 자료나 대상이나 주제를 먼저 물색하고 주어진 형식과 절차에 따라 말을 메워 넣는 방식으로 논문을 쓰고 있다. 석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는 대학에 취직하기 위해 논문을 쓰고, 대학에 취직한 학자는 재임용과 승진을 위해 논문을 쓴다. 생계를 위한 글쓰기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양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전연 도움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저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교수 내지 대학의 통제 혹은 관리에 그 목적이 있는데, 이는 국가주의적 기획에서 기인한다. 둘째 양적 지표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와 관련되었다고 보는데, 이는 한국의 자본주의 문화에 기인한다. ‘국가’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는 사고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분통문답」(分統問答)은 제목만 보면 조선시대의 고전 하나를 뚝 떼어서 번역해 놓은 듯하다. 문학서인 듯하지만, 사상서다. 「분통문답」에는 분자(分子)와 통자(統子)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분자는 한창 학생을 가르치며 연구에 매진하는 중견학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고 통자는 이미 사상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인물이다. 분자와 통자는 현재 한국의 학문 상황과 특히 인문학에 불어 닥친 위기, 그리고 통합인문학에 대한 설명으로 문답을 이어간다.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자연스럽게 통합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이 글에 등장하는 ‘분자’이면서 동시에 ‘통자’이기도 하다.

2부에는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20세기 말인 1998년부터 비교적 최근인 2018년에 발표된 글까지 네 편을 모았다. 1998년에 집필한 「21세기에 국문학 연구가 가야 할 길」에는 비록 아직 ‘통합인문학’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리로 나아가려는 저자의 사고의 궤적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통합인문학으로서의 한국학」에서 통합인문학이 처음 공론화됐다. 세 번째 「학문, 삶, 글쓰기」에는 인문학과 삶의 관련, 인문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피력되어 있으며, 네 번째 「디지털 시대의 학문하기」에는 미증유의 사태라고 할 정보기술의 질주 시대에 인문학의 과제와 책무가 무엇인지를 통합인문학적 견지에서 되짚어 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통합인문학’의 ‘통합’이라는 개념은 ‘융합’이나 ‘융복합’이라는 개념과 큰 차이가 있다. 물론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지적 지평을 열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은 인문학에 대한 인식과 그 존재론적 규정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 지금 한국에서 운위되고 있는 학문의 융합(혹은 융복합)은 ‘실용성’ 혹은 ‘자본’과의 관련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통합인문학은 다학제적인 인문학 연구와도 큰 차이가 있다. 다학제적인 인문학 연구는 현재 인문학의 분과학문적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있으나 급변하는 현재의 문명 상황에서 인문학을 어떻게 재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나 문제의식은 갖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실용성 담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이와 달리 통합인문학은 인문학이 연구 주체와 대상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실용성 담론에 포획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실용성을 뛰어넘는 지점에서 실용성과 연결된다.

통합인문학은 삶을 분절적이거나 요소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지양하고 가능한 한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데, 이는 존재론적 입장과 관련이 있다. 존재는 총체적 연관 속에 있으므로, 총체적 연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존재의 본질에 온전히 다가갈 수 없다. 이처럼 통합인문학에서는 인식의 심화와 확대가 존재의 변화와 확장을 야기하는데, 존재의 확장은 곧 삶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통합인문학에서 말하는 ‘삶’은 단지 인식과 조망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삶이 대상에만 귀속되지 않고 ‘나’에게도 귀속된다는 뜻이다. 지식은 앎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삶의 문제가 된다.

▲ 통합인문학_저자 박희병 서울대 교수
▲ 통합인문학_저자 박희병 서울대 교수

그러므로 통합인문학에서는 진리나 윤리가 학문 ‘밖’이 아니라 학문 ‘안’에 있으며, 나의 외부가 아니라 나의 내부에 있다. 그리하여 학자로 하여금 그 내면을 점점 더 풍성하게 만들고, 인격적으로 더욱 더 향상된 인간으로 나아가게 하며, 그 정신과 의식을 점점 더 높은 방향으로 이끈다. 이렇게 되면 학자는 다시 본연의 책무와 자리를 되찾게 되고, 학문은 다시 세상을 맑게 하고 세상이 나아갈 길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인문학의 위기가 단순히 자본의 논리에 포획된 현 인문대학의 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어떤 것이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을까? 저자는 크게 세 가지 원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분과학문 체제의 문제이다. 분과학문은 ‘전문성’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완고한 자기만의 프레임과 경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프레임과 경계 속에서 학문적 상상력이 작동되고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경계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에 나간다면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분과학문 체제 내에서만 연구와 글쓰기가 이루어지다보니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인 논문만 쏟아진다.

물론 분과학문은 ‘전문성’이라는 장점이 있다. 학문 연구에서 ‘전문성’은 집터를 닦는 것과 같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다. 다만 완고한 현재의 분과학문 체제를 좀 완화해 다른 학문과 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현재 각 대학에서 자행되고 있는, 융복합을 빌미로 한 ‘학과 통폐합’은 사실 분과학문을 없애는 것과 같다. 이 경우 분과학문의 소멸은 새로운 학문의 탄생이 아니라 학문 자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둘째는 지식의 정보화이다. 지식이 ‘읽다’라는 동사와 주로 관련이 있다면, 정보는 ‘보다’라는 동사와 주로 관련이 있다. 디지털 문명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지식의 정보화인데, 정보화된 지식은 고전적 의미의 지식과는 성격이 같지 않다. 고전적 의미의 지식은 단지 정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지표로서 존재한다. 양명학에서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주장했을 때 ‘지’(知)가 바로 이것이다. 이 경우 지식은 내 삶의 실천, 내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준다. 하지만 정보는 다르다. 정보에는 우선 삶과의 통일적 연관이 요청되지 않는다. 필요한 정보를 취할 뿐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사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사유하는 삶이 높이 평가될 때 존중받고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디지털 발전이 인문학에 결코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셋째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삶이란 문제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그 삶에 관한 학문이다. 인문학은 삶의 한 과정으로서 자연을 대하므로, 자연과학에서 법칙과 물리(物理)가 실현되는 세계로 바라보는 자연과는 다르다. 자연과학에서 자연은 분석과 탐구의 대상, 지배의 대상이기는 하나 교감의 대상, 존중의 대상일 수는 없다. 자연에 대한 감수성의 향상은 인간의 내면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그러니 삶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이 자연에 충분히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본령에서 멀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자연을 도외시하는 학문은 온전한 인문학이라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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