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국가의 관계 속에서 언어 형성 과정을 고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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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국가의 관계 속에서 언어 형성 과정을 고찰하다!
  • 김수희 한양여자대학교·일본어일본문화
  • 승인 2020.08.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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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가 말하다_ 『말과 국가 (이와나미 시리즈)』 (다나카 가쓰히코 田中克彦 지음, 김수희 옮김,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60쪽, 2020.06)

만약 역자가 아니었더라면 이 멋진 책에 대해 좀 더 근사하고 객관적으로 소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번역이라는 작업이 그렇지 아니한가. 자식을 키우듯 원서를 구석구석까지 살피고 어루만지다 보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어느 구절 하나 차마 버릴 수 없기 마련이다. 심지어 이 책은 역자 후기에도 썼듯이 한국에서 이미 50권 이상 출판되고 있는 AK 이와나미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이와나미다운 서적으로 꼽힐 수 있는 존재감을 갖추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참신성’에 기인한다. 무려 40년 전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여전히 ‘읽히고’ 있으며 독자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가장 개인적이고 본질적인 ‘말’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거대한 사유를 가능케 하는 낯선 세계로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책을 펼쳤을 때 만날 수 있는 세계는 실로 광범위하며 심지어 펼칠 때마다 늘 새롭다. 시간적으로는 그리스 시대부터 단테의 ‘속어론’이 나온 14세기와 홀로코스트 시절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프로이센과 프로방스, 이베리아반도와 알자스, 시베리아와 이스라엘, 오키나와와 파푸아 뉴기니에 이르고 있다. 

저자는 우선 그리스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모든 민족을 차별적으로 지칭한 그리스인의 이야기나 류큐 방언에 대한 배타적 시선을 통해 ‘말’이 어떻게 국가나 정치와 관계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말’ 그 자체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소쉬르가 ‘이디엄(idiome)’의 개념을 도입해 ‘말’의 주변에 부착된 문화적 부속물(문학, 문법, 사전 등)이나 국가・민족까지 제거한 후 ‘차별’이라는 필터 없이 본연의 ‘말’을 끄집어내고자 했던 것처럼, 언어 주변에 달라붙어 있던 사회적・정치적 요소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를 위해 저자는 ‘모국어’와는 전혀 다른 ‘모어’라는 개념을 중시해 서양의 언어를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단테의 ‘속어론’이 얼마나 용기 있는 발상이었는지, “언어는 언제나 제국의 반려”라고 언급한 네브리하 문법서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명확해진다. 금지의 체계가 가진 배타성,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언어 엘리트와 이에 고통받는 약자들의 관계도 분명해진다.

국가의 언어가 가진 폭력성에 대해서는 프랑스 안의 비프랑스어에 대한 박해와 오크어의 성쇠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명확히 하고 있으며, ‘빌레 코트레 칙령’에서 ‘어머니의 말’이라고 칭해진 프랑스어가 프랑스 혁명에 의해 새롭게 ‘국가의 말’이 되면서 ‘국가와 언어의 관계 모델’이 또 다른 국민국가에서도 활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언어의 중앙집권화에 동반된 소수언어 탄압시스템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는 오키나와나 프랑스 등에서 실시된 체벌 표찰 제도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 저자 _다나카 가쓰히코 田中克彦
▲ 다나카 가쓰히코 田中克彦

일본의 아시아 침략 시절부터 ‘국어애’의 고양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재로 활용되었고 역자 또한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조선어의 마지막 수업’을 자연스럽게 연상하며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대한 고찰도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논지는 매우 저명해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지막 수업』은 현재 이미 교과서에서 배제되고 있는 경향이지만, 알퐁스 도데는 『별』 등의 서정적인 작품을 쓴 작가로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인종적 순혈주의의 복사판인 언어적 순화주의의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특히 고향 땅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에 의해 라인강 변에서 형성된 모어 ‘이디시어’가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행했던 불굴의 도전을 통해 말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 가장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어 순혈주의나 인종적 언어계통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계획적 잡종 언어 에스페란토어나 ‘이디시어’와 마찬가지로 ‘임시변통의 언어’로서의 피진과 크레올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을 통해 언어과학의 전초 기지를 넓혀가고 있다.

순수함이 강력함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가장 순수한 ‘말’의 본연의 모습을 치열하게 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라틴어의 거룩함도, 프랑스어의 단호함도 산산조각이 난다. 언어학의 인종주의가 가진 허망함에 대해서는 차갑게 응시하고 있으나 소수 언어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다. 매력적인 책이다. 


김수희 한양여자대학교·일본어일본문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일어일문학과 문학사, 동 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일본어일본문화 석사, 동 대학 대학원 일본어일본문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번역서에 『조용한 생활』, 『음악의 기초』, 『논문 잘 쓰는 법』,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외국어 잘 하는 법』, 『고민의 정체』, 『책이 너무 많아』 등이 있다. 저서로는 『일본 문학 속의 여성』, 『겐지모노가타리 문화론』, 『일본문화사전』 등 다수.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실무일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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