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윤리- 해칠 힘이 있어도 그 힘으로 민심을 해치지 않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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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윤리- 해칠 힘이 있어도 그 힘으로 민심을 해치지 않는 것 -
  • 신정현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0.07.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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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시사 에세이]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가꾸고, 지키고,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존, 행복, 자유, 평등 등의 가치들이 그들 중 으뜸일 것이다. 어떤 이가, 혹은 어떤 공동체가 사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다른 무엇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떤 이가, 혹은 어떤 공동체가 아무리 엄청난 부와 타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가졌다고 해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부와 영향력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생존과 행복이 있다고 해도 자유와 평등이 없다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소설 『기막힌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소마’(Soma)라는 마약으로 마취되어 구차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처럼, 그 생존과 행복은 껍데기뿐인 생존과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생존, 행복, 자유, 평등 등의 가치들은 대체로 개인과 개인, 강자와 약자, 군주/통치자와 백성/국민, 국가와 국가, 인간과 자연 등의 ‘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성취가 여간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가치들은 톱니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 것들이어서 하나를 잃게 되면 다른 하나도 잃게 되는, 다시 말해 절묘한 균형과 조화와 질서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더더욱 성취가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생존과 행복,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회적 으뜸 가치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국가와 사회라는 삶의 테두리 안팎에 존재하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절묘한 균형과 조화와 질서를 찾아 우리들의 삶에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생존과 행복, 자유와 평등이라는 으뜸의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속 개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은 대체로 어느 개인이나 어느 공동체 일방의 의지로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욕망과 힘의 자기장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복잡하고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관계’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강자들의 올바른 윤리의식이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한 가치들이다. 특히, 이 가치들이 균형과 조화 속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강자 중의 강자’인 군주/통치자의 윤리의식이 절대적이다. ‘군주의 윤리’(the ethic of the prince)가 필요한 까닭이다. 욕망과 힘의 자기장 속에서 ‘군주/통치자’가 자의적으로 이 가치들을 전유(專有)하려 할 때, 그것들은 오히려 백성/국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옥죄는 ‘부정의 가치’(negative value)가 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자유란 때로는 강자들의 방종을 불러와 우리 사회를 무질서와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고, 때로는 자유를 누리는 소수의 ‘자유인’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를 유린해 그들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한다. 에릭 프롬(Eric Fromm)이 그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에서 말했듯이, 자유란 ‘강자들이 휘두르는 부정적 자유로부터 벗어나게 함’(freedom from negative freedom)으로써 ‘약자들에게 ‘진정한 자아’(the authentic self)를 안겨주는 자유’(freedom to positive freedom)가 아니라면, 그것은 오히려 아리고 참담한 ‘부자유’를 유발하는 것으로서 ‘도피해야 할 자유’인 것이다. 평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풍자소설 『동물농장』(Animal Farm)에서 볼 수 있듯이, 소설의 주인공 ‘나폴레옹’ 같은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평등의 가치를 독점하고, 언어를 조작하고 날조해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식을 마비시킨다면, 평등은 권력을 가진 소수 특권층이 사회적 약자들이 누려야 할 기회의 균등을 박탈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소설 속에서 ‘늙은 동물들’은 어느 순간 벽에 걸려 있던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계율이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바뀌어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우리가 군주/통치자에게 ‘군주의 윤리’를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강자 중의 강자’로서 백성/국민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군주/통치자가 지켜야 할 윤리는 무엇일까? 물론 군주/통치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강령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는 힘과 욕망의 복잡다단한 ‘관계’들 속에서 절대의 우위에 있기 때문에, 그의 방종과 자의는 그가 통치하는 국가공동체가 생존과 행복, 자유와 평등 등의 소중한 가치들을 추구해 나아가는 데 있어 지대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인륜’이라는 보편의 윤리와는 상충할 수도 있는 ‘군주의 윤리’라는 또 하나의 윤리가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권리장전이나, 헌법과 법률과 여타의 관습법에 그의 책무가 규정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가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을 소극적인 윤리규정이며, 그로 하여금 백성/국민들과 함께 생존과 행복, 자유와 평등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도록 하는 적극적인 윤리는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백성/국민들의 생존과 행복, 자유와 평등을 지켜줄 적극적 윤리로서의 ‘군주의 윤리’는 무엇인가?

서양의 중세는 군주와 교황이 폭정과 무능과 무관심으로 백성들의 삶을 수탈과 전쟁과 역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어둠의 시대’였다. 우리는 이 시대의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셰익스피어와 마키아벨리와 홉스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선각자들의 생각 속에서, ‘군주의 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어둠의 시대’를 앞에 놓고 물었다. “왕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인가?” “왕이 되려는 자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 “이상적 군주의 책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의 문학과 책들 속에서 이 물음들에 대답하려 했었다.

▲ 셰익스피어_ 소네트94
▲ 셰익스피어_ 소네트94

셰익스피어는 <소네트 94>(“Sonnet 94”)에서 ‘민심을 해치지 않는 것’이 왕이 되려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해칠 힘이 있으면서도 누구도 해치지 않고,
  쉽게 할 수도 있는 그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
  이들은 남을 감동시키면서도 자신은 돌처럼 굳다,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좀체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마땅한 권리로, 이들은 하늘의 은총을 물려받아,
  천성에 갈무리되어 있는 부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

  They that have power to hurt and will do none,
  That do not do the thing they most do show,
  Who, moving others, are themselves as stone,
  Unmoved, cold, and to temptation slow:
  They rightly do inherit heaven's graces
  And husband nature's riches from expense;   (husband: do not squander nature’s gifts)

셰익스피어에게 군주란 ‘마땅한 권리로, 백성들을 해칠 힘을 가진 자”이며, 이상적 군주의 자질은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윤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으로서의 개인적 욕망 때문일 것이다. 소수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그들의 안위와 이익을 살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어떤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혀, 상식과 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 마키아벨리_ 군주론
▲ 마키아벨리_ 군주론

르네상스 시대 정치사상가였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에는 ‘군주의 윤리’를 가르치는 또 하나의 혜안이 들어있다. ‘왕권은 신성불가침’이라는 고래의 생각이 흔들리던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그의 책에서 ‘이상적인 군주’(the ideal prince)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한다. “이상적 군주(ideal prince)란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부리는 그런 못된 군주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행복과 질서’라는 지고지선의 절대가치를 이상으로 하는 사람이며, 그 지고지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권모술수를 부려 권력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권력지향의 인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동선이 되는 지고지선의 가치들이란 결코 ‘좋은 수단’만으로 실현될 수는 없다. 이때 ‘이상적 군주’는 어떤 나쁜 수단이라도 써서 자신이 추구하는 그 지고지선의 가치를 실현시켜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상적 군주’가 ‘좋은 수단’만으로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어떤 나쁜 수단’을 ‘좋은 나쁜 수단’(good bad method)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좋은 나쁜 수단’을 갖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행운의 여신이 자신에게 미소 짓게 하기 위해서는,’ 군주는 어떤 권모술수라도 가리지 않고 써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는 반문한다.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나, ‘행운의 여신이 자신에게 미소 짓게 하는 것’이나, ‘군주가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행복과 질서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좋은 나쁜 수단을 쓰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찌 군주 된 자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좋은 나쁜 수단’을 얻어 그 일을 해내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홉스_ 리바이어던
▲ 홉스_ 리바이어던

르네상스 시대 또 한 사람의 정치사상가였던 토마스 홉스가 쓴 책 『리바이어던』(The Leviathan)에서 우리는 ‘군주의 윤리’에 대한 또 하나의 빼어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책 속에서 홉스는 말한다. “자연 속에는 어떤 경우에도 평등이란 없으며, 자연의 본질은 욕망의 잉여이다. 그리고 자연의 본질이 욕망의 잉여인 이상, 생존을 위한 ‘만인/만물의 만인/만물에 대한 투쟁은 필연이다. 그러므로 자연상태에는 오직 강자와 약자의 투쟁이 있을 뿐이며, 강자의 마음속에 평등을 향한 윤리의식이 있을 때에만 평등의 가치는 실현될 수 있고, 강자의 마음속에서 평등의 실현을 향한 의지가 무너지는 순간, 평등의 가치도 허물어 내린다.” 홉스의 책 속에는 강자 중의 강자인 군주에게 요구되는 ‘평등에의 의지’ 외에,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안녕을 위한 군주의 책무도 기술되어 있다. 홉스가 갈파한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부족과 부족 간의 투쟁도 개인 간의 투쟁만큼 필연이지만, 그것은 개인 간의 투쟁보다 훨씬 치열하고 치명적이다. 이때 공동체들 간의 불화와 전쟁을 막고 국가와 민족과 부족의 안녕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미래를 예측하는 예지력과, 강력한 힘이 떠받는 지엄한 권위와, 괴력에 가까운 추진력을 가진 괴물 같은 군주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리바이어던’이라는 ‘신성한 괴물’이 필요한 것이다.” 홉스가 결론을 내린다. “군주의 굴종과 비굴함으로는 결코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안녕을 지킬 수 없다. 이 세상에 굴종을 어여삐 여겨 평등한 공존을 용인할 강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군주가 자기의 백성을 노예로 만들지 않으려면, 그는 굴종과 비굴함이 아니라 스스로 리바이어던 같은 ‘신성한 괴물’이 되어 막강한 권위로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를 기꺼이 양도하는 투표를 통해 통치자를 뽑고, 그에게 ‘자신들을 해칠지도 모를 권력’을 이양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해칠지도 모를 권력’을 만들어 내는 투표를 하면서, ‘군주의 윤리’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몇이나 될까? 지금 우리는 삶의 테두리 안팎 어디에서도 균형과 조화와 질서를 찾을 수 없는 나락(那落)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잃고 살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곱씹으면서 투표장에 들어서야 하지 않을까? “내가 뽑으려는 통치자는 국민을 해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졌는가? 그는 국민의 생존과 안녕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지략(智略)을 펼칠 것인가? 그는 국민들을 전쟁과 환란이 없는 평온한 세상에 살게 하기 위해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강력한 통치자가 될 것인가?” 국민을 해치지 않으려는 금강석처럼 굳은 의지, 그냥 나쁜 수단이 아닌 ‘좋은 나쁜 수단’을 찾아내는 지략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가진 강력한 통치자 -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들이어야 한다.


신정현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대학교(The University of Tulsa)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1987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The Stylistics of Survival in the Poetry of Robert Lowell”,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문학」, 「서구문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미국시」, 「스페인어권 문학과 미국문학의 충돌과 상호작용」 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는 『The Trap of History: Understanding Korean Short Stories』, 『현대 미국문학론』(공저),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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