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마키아벨리, 웰컴 아렌트!
상태바
아듀 마키아벨리, 웰컴 아렌트!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학
  • 승인 2019.12.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직설] 서유경 칼럼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듯 정치와 도덕은 결코 함께 결합될 수 없는 인간 삶의 분과일까. 원칙상 정치가 어떤 공동 세계의 복리와 관련된 것을 다루는 분과이고 도덕이 우리 영혼의 복리와 관련된 것을 다루는 분과라고 한다면 정치와 도덕의 작동방식 사이에는 분명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구체적으로 특정 정치공동체의 복리를 도모하는 목적에 복무하며 도덕은 그 정치공동체에 사는 특정 시민이 자기 영혼의 복리를 돌보는 일에 관여한다. 가령 우리가 이러한 정치존재론적 구분 방식을 수용한다면 정치와 도덕 사이에는 불가불 어떤 접점이 생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특정 정치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의 사실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얼마 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른바 ‘조국 사태’라는 엄청난 사회적 혼돈 상태를 경험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절대 진리인 것은 분명하다. 당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절대 카오스 상태가 이처럼 많이 차분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와중에서 우리 모두는 전혀 예고도 없이 엄습해온 인지적 교란 현상으로 인해 머릿속이 몹시 복잡했다. ‘우리’와 ‘그들’이 목숨 걸고 벌이는 진영 싸움과 여론몰이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와 ‘너’는 누구 할 것 없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선택을 강요당했다.

매일같이 인정사정없이 밀려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조국만이 검찰개혁의 최적임자이므로 그가 비록 약간의 도덕적 흠결이 있다손 쳐도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하도록 임명을 강행해야 한다는 정치적 논리를 폈다. 이에 맞서는 야당과 반(反)문재인 진영에서는 조국이 사노맹 출신의 빨갱이에 논문표절로 교수가 된 자이며 특정 사학재단의 이익을 대변한 자이고 자녀의 인턴 증명서를 위조한 무자격한 장관 후보자라는 도덕적 논리를 전개했다. 한마디로 조국 사태는 ‘정치냐 도덕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는 프레임 전쟁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잠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언명을 소환해 보자. “인간의 처신에 관한 도덕적 고려의 중심에는 자아(自我)가 놓여 있고, 정치적 고려의 중심에는 세계(世界)가 놓여 있다.” 이 말은 도덕이 개인에 관한 것을 정치가 세계에 관한 것을 다룬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조국의 지지자들은 정치적 프레임을 그의 반대자들은 도덕적 프레임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냐 도덕이냐’라는 프레임 전쟁보다 훨씬 더 심오한 한국정치사적 의미는 조국의 지지자인지 아니면 반대자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깊이 고민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분명 그것의 본질은 정치와 도덕의 분리가 아닌 양자의 결합 필요성에 대한 사실적 인정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아렌트로 돌아가자. 그의 유명한 ‘악의 평범성 테제’는 단순히 사람이 사유(思惟)함 없이 사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으며, 우리가 결코 우리 각자의 선택과 관련된 정치적 판단의 문제와 각자가 속한 세계, 즉 정치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일깨운다. 그것은 정치적 판단의 중심에는 우리가 함께 속한 세계에 대한 고려가, 도덕적 책임 문제의 중심에는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한 고려가 놓여 있어야 한다는 그의 정치철학적 전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렌트는 우리에게 세계 차원의 정치적 판단과 개인 차원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두 가지 시민적 의무를 동시에 이행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우리를 몹시 당혹케 했던 조국 사태는 필경 새 시대의 전령이었으리라. 아듀 마키아벨리, 웰컴 아렌트!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교수로 현재 한국NGO학회 회장이다. 주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민주주의의 패러다임 전환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와 『제3의 아렌트주의』 (근간), 역서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 읽기』, 『시민사회』,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책임과 판단』 (근간)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