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공부와 활용 … 〈한일고금비교론〉 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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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공부와 활용 … 〈한일고금비교론〉 ⑱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4.03.2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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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한국인도 일본인도 한문을 공부했다. 한문을 공부하려면 선생이 있어야 했다. 책을 보고 독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문을 먼저 공부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선생 노릇을 해야 했다.

한문은 중국에서 생겨났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동한 선생이 한국인에게,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한 선생이 일본인에게 한문을 가르쳐준 것이 같다. 그 이유는 중국ㆍ한국ㆍ일본의 지리적 위치에 있다.

한문을 공부한 순서나 도달한 수준이 한 단계씩 달라, 중국은 중심부, 한국은 중간부, 일본은 주변부이다. 한문 사용 이전의 고유문화는 그 역순으로 잘 보존하고 가꾸었다. 우열이 서로 반대로 되어 대등하다.    

한문은 동아시아의 공동문어여서, 한문문명권이다. 이것은 중세에 이루어진 네 문명권의 하나이다. 다른 세 문명권 산스크리트ㆍ아랍어ㆍ라틴어문명권과 성립 시기나 기본 성격이 대등하다. 어느 문명권이든지 중심부ㆍ중간부ㆍ주변부로 구분되고, 이것들도 서로 대등하다. 

한문문명권에 들어가 한국이나 일본은 中世化(중세화)했다. 中世化로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고,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한국의 三國은 고대에 머무르고 있던 夫餘(부여), 三韓(심한), 伽耶(가야), 耽羅(탐라) 등을 흡수했다. 일본인은 아이누인을 북쪽으로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아이누인이 한문을 받아들여 中世化하고 일본인은 고대에 머물렀더라면, 반대로 되었을 것이다. 

한문을 활용해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은 조직 정비, 문서 작성, 외교 수행 등에서 확인된다. 이런 필수적이고 일반적인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 한문으로 국가의 위업을 찬양하는 碑文(비문)을 써서 돌에 새기는  것은 선택 사항이었다. 그런 것을 國碑(국비)라고 일컫고, 비교해 고찰하자.

414년 고구려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 445-450년 신라 赤城碑(적성비), 475년 고구려 中原碑(중원비), 561년 신라 昌寧碑(창녕비), 568년 신라 黃草嶺碑(황초령비)와 摩雲嶺碑(마운령비), 569년 신라 北漢山碑(북한산비), 596년 일본 伊豫道後溫湯碑(이세도후온탕비), 이 명단이 흥미롭다.

고구려나 신라의 여러 國碑는 국토 확장의 위업을 이룩한 국왕을 찬양하는 경쟁을 했다. 일본의 伊豫道後溫湯碑는 聖德太子(쇼우토구타이시)가 고구려 승려 恵慈(에지)와 함께 온천을 찾아간 것을 기념해 쓴 비문이다. 늦게 나타나고, 국토 확장과 무관하며, 찬양의 대상이 국왕은 아닌 특수성이 있다. 경쟁할 국가가 없고, 국토의 경계가 모호하며, 통치체제가 확립되어 있지 않고, 한문 구사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摩雲嶺碑에서는 말했다. “무릇 순풍이 불지 않으면, 세상의 도리가 진실과 어긋난다. 궁극적인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릇된 것들이 나타나 다툰다. 그러므로 제왕은 나라를 세우고 자기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夫順風不扇 則世道乖眞 玄化不敷 則邪爲交競 是以 帝王建號 莫不脩己 以安百姓)고 했다. 

순풍이 불고, 玄化(현화)라고 한 자연의 궁극적인 변화가 차질없이 이루어야 백성이 편안해진다. 이를 위해 제왕은 나라를 세우고,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한다. 순풍과 玄化를 해치는 무리를 제압한다. 자기 몸을 닦아, 이루어질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통로를 만든다. 이처럼 고차원의 정치철학을 정립하고 표현할 역량을 가졌다. 

伊豫道後溫湯碑에서는 말했다. “만 가지 일을 관장하는 통치자는 백성의 요구에 절묘하게 응답하고, 백성은 그렇게 하도록 잠자코 부채질한다. 사사로움이 없이 빛을 비추는 것이 壽國이 華臺에 따라 열리고 닫힘과 같다.”(萬機所以妙應 百姓所以潜扇 若乃照給無偏私 何異干壽國 随華臺而開合) 

‘壽國’(수국)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수명이 긴 나라’이지만, 뒷말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연꽃’이고, 부처님을 믿어 오래 번성하는 나라이다. 통치자와 백성이 불교에서 말하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소망을 사실인 듯이 말했다. 동행한 승려 恵慈가 글을 써준 것 같다.

역사 서술은 中世化 여부를 가리는 척도이다. 사실이라고 여긴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기록한 1차 역사서를 불만스럽게 여기고 가다듬어 2차 역사서를 이룩한 것은 中世化의 수준 향상을 입증한다. 그 단계에서는 역사관 쇄신을 분명하게 밝히는 表文(표문)을 썼다. 이에 관한 비교가 긴요한 과제이다. 장황한 논의는 피하고 핵심만 간추려 말한다.   

1060년의 중국 <進唐書表>를 보자. 기존 역사서가 “기록 순서에 원칙이 없고, 상세하고 소략한 것이 적절하지 못하며, 글이 빛나지 않고, 사실이 엉성한”(紀次無法, 詳略失中, 文采不明, 事實零落) 결함을 고쳐 써야 한다고 했다. 어느 경우에든 타당한 말을 하고, “천하가 화평하고 백성의 삶이 안락하게 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정치의 요점을 갖추자”(天下平和 民物安樂 而猶垂心積精 以求治要)고 하는 희망을 추가했다. 수준 향상의 당연한 과정을 보여주었다.

1145년의 한국 <進三國史記表>를 보자. “그 옛적 기록은 글이 거칠고 졸렬할 뿐만 아니라 사실이 누락되었다”(其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는 말로 기존 역사서의 결함을 명백히 했다. 그것은 사실판단의 과오에 그치지 않고, 인과판단이나 가치판단을 그릇되게 하므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왕과 왕비의 선악, 신하의 충성 여부, 나라의 편안함과 위태로움, 인민의 행복과 불안, 이 모두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경계를 삼을 것이 없다”(是以君后之善惡 臣子之忠邪 邦業之安危 人民之理亂 皆不得發露 以垂勸戒)고 한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는 보편적인 이유를 밝히고 평가하는 것이 역사 서술의 임무라고 했다.  

1819년의 일본 <進大日本史表>를 보자. 서두에서 대뜸 “(엎드려 살피건대 태양이 비추는 곳은 日域이 아님이 없다. 皇化를 입은 곳들 바다를 둘러 天朝를 우러른다. 제왕이 세 가지 神器를 물려받고 신성한 통치를 베풀어, 보배스러운 징조의 흥함이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다”(伏惟太陽攸照 率土莫匪日域 皇化所被 環海咸仰天朝 帝王授受三器 徵神聖之謨訓 寶祚之隆與 天壤無窮)라고 했다. 日域(일역)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기도 하고, 일본의 강역이기도 하다. 태양이 비치는 곳은 모두 皇化(황화)가 미치는 일본의 강역이어야 한다는 엄청난 소리를 했다. 皇化나 天朝(천조)는 일본 天皇(텐노)의 통치를 말한다. 일본은 신성한 나라임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 역사서를 다시 쓰는 이유라고 했다. 보편주의 역사관의 진전을 뒤늦게 역행하고, 더욱 협소해진 의식으로 특수성을 추구했다.

한문을 원래의 어순에 따라 읽는 順讀(순독), 자국의 어순으로 바꾸어 읽는 顚讀(전독)의 두 가지 독법이 한국과 일본에 다 있었다. 한국은 順讀을, 일본은 顚讀을 택하고 다른 것은 버렸다. 글읽기를 정확하게 하는 데는 顚讀이, 글쓰기 수련을 위한 글읽기에는 順讀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국 고전에 대해서 일본은 전문에 대한 정확한 주해를, 한국은 그 내용에 관한 논의를 하는 데 각기 힘썼다. 

일본은 글읽기, 한국은 글쓰기를 장기로 했다. 일본의 한학자는 독해전문가이고, 한국의 한학자는 자기 글을 쓰는 작가였다. 일본에는 科擧(과거)가 실시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科擧에서 製述(제술)이라고 하는 글쓰기가 가장 긴요한 과목이었다. 과거 공부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선비는 천지만물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스스로 논하는 글을 쓰는 데 더욱 힘썼다. 그 결과 수많은 문집이 남아 있다. 

서세동점에 의해 유럽문명권의 책이 밀어닥치자, 일본인들은 글읽기의 장기를 크게 발휘해서, 강독하고, 주석하고, 번역하는 데 힘썼다. 이룬 성과가 대단해서 유럽 각국보다 뒤지지 않았다. 유럽문명권의 학문이나 문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대단한 성공사례를 이룩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한문 고전을 공부하던 방식을 原書(원서)라고 일컬은 유럽문명권의 책에다 적용했기 때문이다.

原書를 읽어 얻은 지식을 일본에서 자기 것을 창조하는 데 쓴 것은 아니다. 남들이 써놓은 글을 그 자체로 따지고 옮기고 했을 따름이고, 거기 대응되는 자기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았다. 이해하고 수용하는 단계를 지나면 창조를 하는 다음 단계에 들어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일본은 최선진의 경제대국이 되고서도, 과학기술이나 경제발전에 직접 소용되지 않는 이론적이고 창조적인 학문의 영역에서는 유럽문명권 추종자의 자세를 과거와 다름없이 견지하고 있다. 최고 석학이라는 中村元(나카무라하지메)가 일본의 학문은 “노예의 학문”이라고 스스로 질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도 일본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유럽문명권의 저작을 정확하게 읽어 이해하고, 충실하게 번역하는 데 힘쓴 것은 다시 생각하면 어리석다. 가능한 일이 아니고, 끝이 없다. 문화의 전통이 크게 달라 번역이나 소개를 정확하게 할 수 없다. 자기 체험과 동떨어진 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정확한 소개와 피상적인 이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본인이 그렇게 한 전례를 한국인은 뒤늦게라도 본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동반자살 권유이다.     

한국인은 글읽기를 잘하지 못한다. 글을 정밀하게 읽어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대강 훑어보고, 함부로 옮기는 탓에 오역을 많이 하고, 엉뚱한 말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일본인과는 다른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일본인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자. 우리가 이해한 대로 논의하고, 자기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거기 대응이 되는 새로운 창조를 해야 한다. 글읽기에 힘쓰기나 해서는 유럽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도 따를 수 없고, 글쓰기를 대응책으로 삼아야 맞서고 앞설 수 있다. 그 길로 나아가 인류의 지혜를 더욱 향상하는 과업을 담당해야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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