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바르부르크의 이미지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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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바르부르크의 이미지 사유
  • 김보라 홍익대·예술학
  • 승인 2024.03.2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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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아비 바르부르크』 (김보라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121쪽, 2024.02)

 

어느 여름날 나는 함부르크 외곽의 공동묘지를 한참 동안 헤매고 있었다. 입구 안내소의 컴퓨터 검색대에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후 길을 나섰고 손에 쥔 지도를 연신 확인하며 걸었음에도 바르부르크의 묘소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장소라 홀로 난감해하던 차에 갑자기 등장한 작업부는 마치 천사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길을 물어 겨우 발견한 구석진 곳에 바르부르크의 묘비가 서 있었다. 구글 이미지로 보았던 모습과 달리 시간의 더께로 흐려진 명문(銘文)이 눈에 들어왔다. ‘MNEMOSYNE’. 바르부르크를 생각할 때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므네모시네는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하우스와 런던 바르부르크연구소의 현판, 바르부르크의 마지막 미완성 프로젝트 제목 ‘이미지 아틀라스 므네모시네(Der Bilderatlas Mnemosyne)’에도 담겨있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그리스 신화의 므네모시네는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뮤즈의 어머니이자 기억의 여신이다. 9명의 뮤즈가 각각 담당한 서사시와 역사, 노래, 춤, 서정시, 비극과 희극, 천문학 등 인간의 학문과 예술 활동은 모두 기억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함부르크 올스도르프에 있는 바르부르크의 묘비에 새겨진 므네모시네 ⓒ김보라

므네모시네, 즉 기억은 도상학의 창시자이면서 이미지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독일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가 일평생 매달린 화두였다. 일찍이 인간의 심리 표현과 몸짓 언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이미지 연구를 진행했으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 조각, 공예, 인쇄물, 광고 등 폭넓은 자료를 탐구하여 미술사 분야를 문화학으로 확장했다. 그의 연구 범위는 신화, 종교, 천문학, 점성술, 연극,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제의를 포괄하므로 이미지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라 평가받기도 한다. 조현병 치료를 위해 몇 년간 체류한 스위스의 요양원에서 함부르크로 돌아온 이후 1929년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바르부르크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이유는 그가 남긴 방대한 장서와 기록, 자료 덕분이다. 이를 토대로 세워진 런던의 바르부르크연구소와 1993년에 새로 복원된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하우스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그의 학문적 유산을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바르부르크 관련 대표 이론가를 언급하자면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 프랑스의 이미지 역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1953- )을 들 수 있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며 피렌체에 체류하기 시작한 바르부르크는 당시 미술사의 자율성을 강조했던 학자들과 다른 노선을 취했다. 미술 작품의 양식만을 분석하지 않고 문학과 연극 의상, 경제 문서 등 다양한 자료를 함께 탐구한 것이다. 그는 생활 속 이미지와 이미지의 생명력에 관심을 기울이며 미술 작품을 넘어 인간의 삶과 문화 전반을 다루었다. 바르부르크는 191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미술사학회를 계기로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가 주도적으로 기획한 행사였다. 학회에서 바르부르크는 페라라 스키파노이아 궁전 프레스코화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바르부르크는 ‘도상학적 분석(ikonologische Analyse)’에 대해 “국경 수비대의 구속에 제한받지 않고 고대, 중세, 근대를 서로 이어지는 시대로 간주하며 순수미술과 공예를 동등한 표현 자료로 고찰하는 방식”이라고 밝힌다. 자신의 도상학이 학제적 연구를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 정의였다. 

건물 정면에 문자 K.B.W.가 보이는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하우스 ⓒ김보라<br>
건물 정면에 문자 K.B.W.가 보이는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하우스 ⓒ김보라

1866년 함부르크의 유명 은행가 가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바르부르크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학문에 뜻을 두었다. 13세의 바르부르크가 마음껏 책을 살 수 있는 권리와 장자권을 맞바꾸자고 동생에게 제안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이같이 학문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 바르부르크의 열망은 폭넓은 자료 수집으로 이어졌다. 바르부르크는 본, 뮌헨, 스트라스부르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미술사 연구를 이어가면서 방대한 양의 도서를 계속적으로 구입했으며 점증하는 장서를 보유하기 위해 고향 함부르크에 도서관을 설립한다. 일명 ‘K.B.W.’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바르부르크문화학도서관(Kulturwissenschaftliche Bibliothek Warburg, 이하 K.B.W.로 줄임)은 엄청난 수집욕을 지닌 한 개인의 공간이라기보다 강연과 기획 전시가 열리는 연구 플랫폼이었다. 에드가 빈트, 에른스트 카시러, 에르빈 파노프스키 등 일명 바르부르크 써클이라 불리는 학자와 함부르크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천문학자 케플러의 타원 궤도 법칙에 대한 바르부르크의 관심을 반영하여 타원형 공간으로 디자인된 열람실이 위치한 1층에는 표현의 일반 문제와 상징을 다룬 책, 2층에는 예술론과 예술사, 3층에는 언어와 문학, 4층에는 역사, 법 등에 관한 도서가 배치되었다. 바르부르크뿐만 아니라 한때 도서관 책임자였던 프리츠 작슬, 사서 게르트루트 빙 등에 의해 남겨진 기록이 도서관 일지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바르부르크의 표현에 따르면 K.B.W.는 ‘좋은 이웃의 법칙’을 따르는 공간이었다. 보편적 도서분류 체계가 아니라 상호연관성을 고려해 다양한 분야의 책이 나란히 배열되었다는 의미다. 또한 ‘말하기만 하지 않고 귀 기울이는 도서관’으로서 이는 K.B.W.가 근본적으로 여러 학문과 연구 자료에 열린 공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르부르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이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도서관 장서는 런던으로 옮겨졌고 현재의 바르부르크연구소(The Warburg Institute)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곳을 이끌었던 역대 소장 중 한 사람이 바로 최초의 바르부르크 전기 저자이자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를 쓴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다. 
 
하나도 버릴 줄 몰랐던 바르부르크가 남긴 수많은 난필의 기록을 읽느라 겪은 고생을 어느 인터뷰에서 토로한 곰브리치는 전기 『아비 바르부르크: 지적 일대기(Aby Warburg: An Intellectual Biography)』에 다음과 같은 바르부르크의 메모를 인용한다. “내가 남기는 이미지와 글은 후세가 충동적 주술과 담론적 논리 사이 긴장 상태라는 비극에 저항할 자의식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필자의 강조).” 이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문장을 반복해 읽으면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후대에 남기는 작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회적 혼란과 정신의 붕괴라는 개인적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도 인간 심리를 탐구한 연구자로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바르부르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시금 새기는 것이다. 한 소설가의 말처럼 “기억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는 없다.”(정세랑, 『시선으로부터,』(2020) 중에서). 

필자는 그동안 발표했던 바르부르크 관련 논문을 요약하여 지난 2월 『아비 바르부르크』를 출간했다. 10개의 키워드를 통해 현대의 사상가에 접근한다는 출판 기획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미 100여 권이 발간된 이론 총서 시리즈에 속하는 책이다. 파토스포르멜, 사유공간, 고대의 잔존 등 바르부르크의 이미지론과 연관된 핵심 개념을 추출하여 간략히 설명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생소하게 느낄지 모를 국내 독자에게 일종의 안내서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 작은 책이 인간 표현의 심리학, 이미지와 기억을 평생의 연구 주제로 삼았던 바르부르크의 삶과 학문 세계로 이끄는 초대장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 디디-위베르만의 말대로 “이미지를 해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이미지를 이해하려 한” 바르부르크의 학문은 이미지 생산과 소비, 유통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재를 성찰할 기회를 마련하리라 기대한다.

 

김보라 홍익대·예술학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초빙교수. 독어독문학과 예술학을 전공한 후 이미지와 기억, 매체 확장, 이미지 생태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 ≪입장들≫, ≪크라프트베어크2019: 호모 심비우스≫ 기획에 참여했으며 2021년 호반문화재단 H아트랩 1기 입주이론가로 선정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 “세계극장: 아비 바르부르크의 문화이론에 나타난 퍼포먼스 패러다임”(2020), “디지털 미디어 시대  회화의 확장에 대한 고찰”(2019)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아트폼스』(공역, 2016), 『미디어비평용어21』(공역, 2015),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과 비평 40선』(공역, 2013), 『개념미술』(2008), 『바실리 칸딘스키』(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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