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은 계급화된 퍼포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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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은 계급화된 퍼포먼스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3.2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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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 천장: 커리어와 인생에 드리운 긴 그림자 | 샘 프리드먼·대니얼 로리슨 지음 | 홍지영 옮김 | 사계절 | 472쪽

 

이 책은 영국 최대 고용조사인 노동력조사(LFS)를 통해 확보한 10만 8000명의 개인 및 엘리트 직종 종사자 1만 8000명의 계급 배경 데이터와 방송, 회계, 건축, 연기 등 네 직업에 걸친 175건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타고난 조건에 의한 불평등과 ‘능력’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대한 실증적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

사회 이동성 연구에 페미니즘이 발전시킨 ‘유리 천장’ 개념과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을 결합한 이 책은 성별, 인종-민족, 계급 등 여러 요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커리어 진입 이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이어지는 계급의 영향력을 추적한다. 출신 계급에 따라 임금과 커리어 진전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특권이 ‘능력’으로 오인되며 형성되는 ‘계급 천장(class ceiling)’ 때문이었다. 

두 저자는 방송사, 회계법인, 건축 회사의 직원들과 연기자들을 심층 인터뷰하여 각 직종에서 요구하는 ‘능력’의 개념이 상당히 모호하며, 사실상 특권층 출신이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수행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는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흔히 제시되는 공정한 경쟁을 통한 사회 이동성 촉진,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의 실현과 같은 정치적 수사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주는 결과다. 저자들은 성별이나 인종과 마찬가지로 출신 계급도 보호받아야 할 속성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며, 계급 천장을 부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이 공들여 입증하는 것은 직업적 성취의 핵심 요건이라 여겨지는 ‘능력’이 사실상 매우 모호한 개념이며, 많은 직종에서 유리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더 쉽게 획득하고 더 적합해 보이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학력이나 기술, 자격의 획득 같은 능력의 객관적 지표나 타고난 재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식별되고 인정받는 방식이 특권층에게 유리한 쪽으로 형성되어 있어 노동 계급이나 중간직 출신은 동일한 역량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수행해 보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즉 ‘능력’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많은 부분이 특정 계급의 문화, 언어, 취향, 행동 규범 등에서 비롯한 계급화된 퍼포먼스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발전시킨 ‘유리 천장’ 개념을 ‘계급 천장’으로 재구성해 제안하고 있지만, 계급 천장이 유리 천장을 대체했다거나 ‘계급’이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불평등의 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자들은 책 전반에 걸쳐 계급, 성별, 인종-민족, 장애 등 여러 불평등의 축이 함께 작용하여 개인에게 이중, 삼중의 불이익을 주는 현실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례 연구 대상인 방송, 회계, 건축, 연기 분야에서 직종에 따라 불평등의 축이 어떻게 달리 작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저자들이 이미 상당한 비판을 받은 ‘유리 천장’ 개념을 재구성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성 불평등을 공공 의제의 우선순위로 끌어올리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와 마찬가지로 ‘계급 천장’이라는 개념이 출신 계급에 의한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지식의 축적과 정치적 행동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썼다.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의 대물림 현상이 뚜렷하고, 계급 간 격차가 점점 커지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들의 연구와 정치적 호소가 주는 울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사회 이동성 연구를 혁신했다. 첫째, 부모의 직업(계급 태생)과 응답자 본인의 직업(계급 도착지)을 비교해 위치 변화를 측정하던 주류 이동성 연구에 페미니즘의 ‘유리 천장’ 개념과 ‘엘리트 채용의 사회학’의 오랜 연구 전통을 결합해 계급 구조 최상위층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봉쇄에 초점을 맞춰 사회 이동성 분석을 진행했다.

둘째, 직업에 진입하는 시점에 사회 이동이 끝난다고 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진입 이후 ‘누가 성공하는가’, ‘커리어 진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로 초점을 옮겼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부르디외의 이론적 렌즈를 도입했다. 부르디외의 하비투스, 자본, 장 등의 개념을 통해 개인이 직장에 가져가는 자원 또는 ‘자본’이 무엇인지, 그것이 사람들의 이동 궤적에 장기적으로 어떤 파급 효과를 미치는지 살펴보았다.

셋째, 사회 이동성을 개인의 자원이나 행위 주체성이라는 프리즘뿐만 아니라 개인이 진입하고 통과하는 특정 직업 공간, 즉 부르디외의 ‘장’에 의해 매개되는 경험으로 이해하고 각 직종 및 직장 내부에서 요구하는 ‘장 특수적 자본’에 주목했다. 저자들은 개인이 각자의 계급 배경에서 물려받은 자본이 노동 시장에서 자동으로 이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장에 특화된 형태로 전환되어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네 직종의 175명을 대상으로 한 이들의 질적 조사는 개인이 상속받은 경제, 사회, 문화 자본이 특정 직종이나 직장이라는 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더 수월하게 혹은 가까스로 ‘현금화’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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