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의 철학’, ‘평화의 철학’으로 향하는 레비나스 사유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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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의 철학’, ‘평화의 철학’으로 향하는 레비나스 사유의 출발점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3.2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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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과 타자 [개정판] |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음 | 강영안·강지하 옮김 | 문예출판사 | 168쪽

 

《시간과 타자》는 레비나스의 독창적 사유가 집약된 책으로, 강연록의 형태라 엄밀하고 치밀하게 논리를 전개해나가기보다는 강의하며 청중들과 대화와 생각을 나눈 과정을 담고 있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과 전쟁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타자를 주체에 흡수해온 서양철학의 전통이 상대를 말살하려는 전쟁과 전체주의에 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유대계 철학자로서 그 자신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수용되고 가족과 지인의 죽음을 목격한 경험, 즉 국가사회주의의 출현과 2차 세계대전 발발에서 그가 철학자로서 받은 충격이 담겨 있다.

레비나스는 파르메니데스부터 하이데거까지, 서양철학이 ‘타자의 흡수’를 지향해왔다고 비판했다. 타인의 타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축소한 후 흡수하여 주체의 근거를 확립해왔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흡수’는 곧 타자성의 삭제다. 레비나스 사유의 독창성은 그가 서양철학이 주체를 개념화해온 방식을 비판하면서도 주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레비나스는 자아나 주체성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강력히 반대했다. 대신 타인을 수용하고 환대하는 주체성,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주체성을 모색했다. 서양철학의 전통과 과감히 단절하면서도 포스트모던 철학과는 거리를 두어 자신만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주체의 내용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채우기 위해 ‘존재론적 모험’을 시도한다. 출발은 ‘홀로서기’다. 주체의 홀로서기는 존재의 익명성에 매몰되지 않고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일이다. 홀로서기는 ‘초월’의 전제 조건이다. 닫힌 주체,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초월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짊어지는 힘겨운 사건인 홀로서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홀로서기만으로는 존재 저편으로 나아갈 수 없다. 즉, 진정한 타자와 미래를 마주할 수 없다. 홀로서기를 통한 존재론적 도약은 주체의 테두리 안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고통과 죽음, 에로스의 경험은 홀로 선 주체가 마주한 장벽을 넘어서게 해준다. 고통, 죽음에 직면한 주체는 자신이 존재의 오롯한 주인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죽음을 통해 내가 지배할 수 없는 미래를 마주하는 것이다. 에로스 역시 존재의 전체성을 깨는 경험이다. 에로스의 대상은 손에 쥘 수 없는 타자의 표상으로, 고유한 신비를 지닌다. 레비나스에게 애무는 손에 잡을 수 없는, 계속 내 손을 벗어나는 무언가와의 놀이다. 근본적 타자성을 향한 손짓이다. 고통과 죽음, 에로스는 홀로 선 주체가 주체의 테두리 저편에 놓인 가능성을 마주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고통과 죽음, 에로스의 경험을 통해 자기 존재에 갇힌 주체가 만나는 타자는 누구이며, 이 만남은 시간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앞의 경험으로 주체는 고독(홀로서기)을 깨뜨린다. 그리고 절대적 타자성을 상실하지 않은 타인을 대면한다. 기존의 철학은 타자를 소유하고, 장악하고, 인식하고자 했다. 즉, 타인을 타인이게 하는 모든 것을 삭제한 후 주체와 대면하게 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주체가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을 소거하지 않은 채 마주하는 방법,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철학적 방법을 고안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미래가 도래한다. 계획하고 예상할 수 있는 미래는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이 고려되지 않는 미래, 주변의 모든 차이를 소거한 후 세상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주체가 그려내는 미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인을 대면하면 절대적으로 다르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손에 거머쥘 수 없고 우리를 엄습하여 사로잡는 미래 말이다. 레비나스는 절대적 타자성을 담지한 타자를 마주한 후 열리는 알 수 없는 미래가 품은 가능성을 철학의 언어로 펼쳐낸다. 그에게는 타자가 곧 미래고, 타자와의 관계가 곧 미래와의 관계다.

《시간과 타자》는 레비나스가 2차 세계대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을 한 서로 다른 나이, 성별, 형편의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인간의 존재 의미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이 경험은 레비나스가 추후 펼쳐낼 무수한 철학적 기획의 초석이 되어 동시대를 성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사유의 길로 안내했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뒤집으면서도 회의론으로 빠지지 않는 독창적 사유, 타인의 절대성이 깃든 얼굴을 마주하는 철학의 출발점으로 이 책을 자리매김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고통과 구체적 삶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고통받는 자에 대한 책임과 연대를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 윤리, 연대, 고통의 주제가 여전히 긴급하게 요청되는 우리 시대에 더욱 첨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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