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적 자연·생명·우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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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적 자연·생명·우주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3.2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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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33강_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의 「현대 과학적 자연·생명·우주관」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관찰되는 새로운 흐름을 정리해 보는 다섯 번째 섹션 ‘오늘의 과학 기술’ 제33강 이덕환 교수(서강대 명예교수)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현대 과학적 자연·생명·우주관


이덕환 교수는 “과학이 없었으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빌려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가치는 명백”하다는 전제 아래 “우주ㆍ자연ㆍ생명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노력”으로서 “현대 과학적 세계관”, 즉 우주에 대한 이해, 지구의 구조, 만물의 작동과 변환, 생명의 정체와 진화 등을 개괄한다. 그에 이어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자연의 사물을 자신에게 유용한 목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라 할 기술의 “사회적 가치와 기능에 대한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면서 “유사(類似) 과학과 반(反)기술 정서”에 대해 비판한다. 결국엔 “단편적인 과학적 지식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과학적 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비판적 합리성(critical rationalism)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 정신(scientific spirit)’’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2월 24일, 이덕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3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서론

지난 한 세기 동안 본격적으로 발전한 현대의 자연과학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추론적ㆍ사변적ㆍ관념적ㆍ교조적이던 전통 사상과 자연철학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엄격한 경험적 반증(反證)을 거친 ‘과학 지식(scientific knowledge)’,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강화하는 ‘과학 기술(scientific technology)’, 그리고 합리성ㆍ개방성ㆍ객관성ㆍ민주성ㆍ정직성ㆍ보편성을 강조하는 ‘과학 정신(scientific spirit)’을 근거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자리를 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가치는 명백하다.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이 없었으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했다’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진정한 과학 교육만이 현대 사회의 학생들에게 ‘미래 행복’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2. 현대 과학적 세계관

현대의 자연과학은 우주ㆍ자연ㆍ생명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노력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에서 인류의 보금자리인 지구의 환경에 이르는 모든 것이 자연과학의 탐구 대상이다. 심지어 세상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기는 인간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도 자연과학의 영역이다. 그런 현대 과학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과학의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가 설명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고, 지구상에서 우리의 생존은 여전히 위태로운 형편이다.

현대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실제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논리적인 수학의 언어를 최대한 활용한다. 철저하게 통제된 ‘실험’에 의한 검증과 반증을 통해 겉으로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자연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과학은 난해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3.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술

기술은 자연의 사물을 자신에게 유용한 목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사실 인류 문명은 수많은 기술적 발명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천부적인 인권을 가진 존재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적 사회 참여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현대적 ‘민주주의’가 싹튼 것은 석탄의 안전한 연소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화 기술의 등장 덕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의 인류가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건강하고, 평등하고, 안전하고, 편리하고, 민주화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서 편익을 극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것인지의 문제가 현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심각한 과제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 현대적 기술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실제로 기술의 부작용은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말의 산업 혁명 과정에서는 산업화 기술을 거세게 거부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술의 사회적 가치와 기능에 대한 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더럽고, 위험한 기술은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4. 유사(類似) 과학과 반(反)기술 정서

인류의 과욕과 탐욕에 의한 과도한 기술 개발이 지구촌 파국의 핵심 원인이라고 한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환경을 파괴했다’는 것이 공통 주장이다. 지금의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종말론도 진화했다.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이 대표적인 근대의 종말론이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맬서스는 ‘빈곤이나 범죄와 같은 사회악의 원인이 되는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종말론적 맬서스주의는 ‘기술 도약’의 가능성을 간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우리는 ‘괴담 공화국’에 살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기업의 노이즈ㆍ공포 마케팅, 특종에만 매달리는 황색 저널리즘, 엉터리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유사(類似)ㆍ가짜(fake) 과학으로 무장한 ‘괴담’이 온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괴담은 ‘무지’와 ‘이기심’을 먹고산다. 괴담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思考)를 포기하고,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국민의 건강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괴담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5. 교양으로서의 과학적 세계관

현대의 교양(敎養)은 민주 사회에서 품위와 인격을 갖추고,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개인적ㆍ사회적ㆍ정치적 문제에 대한 독립적ㆍ합리적ㆍ이성적 판단과 자신의 호기심 충족에 필요한 폭넓고 풍부한 지식과 상식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단순한 단절의 수준을 넘어 심각한 대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과학은 인문학이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이라는 인식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과 과학이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대립의 결과는 과학과 인문학 모두에 치명적이다. 국민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인문학과 과학을 모두 외면했기 때문이다. 과학계에서 우려하는 청소년의 이공계 기피와 인문학계에서 걱정하는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과학과 인문학의 오랜 대립이 가져온 결과다.

인문학 중심의 교양 교육을 과감하게 개편해야 한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교양을 길러주기 위한 교육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미래의 세상을 현재와 전혀 다르게 만들어줄 현대 과학과 기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상식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대학에서의 교양 교육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두 축으로 확실하게 개편해야 한다. 인문학을 소홀히 하는 교양이 무의미한 것처럼, 과학기술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교양 교육도 용납할 수 없다.

과학 교육에 대한 획기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쉽고 재미있는 단편적 과학 상식의 교육은 의미가 없다. 현대의 과학을 인문학적 평가나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현대적 교양에서 단편적인 과학적 지식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과학적 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비판적 합리성(critical rationalism)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 정신(scientific spirit)’이다. 과학의 탈을 쓴 ‘가짜’ 과학 지식의 식별에 필요한 사고방식이 바로 과학 정신이다.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기적과 신비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그 출발이다. 능력에 따라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진정한 ‘공정’과 ‘정의’이고, 그것이 바로 과학 정신의 핵심이다.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의 사고를 거부하는 것도 과학 정신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마구 함부로 쓰면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고, 아무리 나쁜 것이라도 충분한 대책을 마련해서 현명하게 사용하면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해주는 약(藥)이 된다. 결국 원전은 위험해서 버리고, 석탄은 더러워서 포기해야 하고, 신재생은 모두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탈원전은 반(反)교양적인 것이다.

교양 교육에서 강조하는 융합의 정체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학생들에게 단순히 낯설고 이질적인 분야를 모두 섭렵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융합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교양을 위한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진정한 융합은 서로의 차이를 해소해서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상보적(相補的)인 ‘둘’로 차별화하는 것이 진정한 융합이다.

교양 교육을 위한 과학과 기술, 그리고 과학기술 담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 분야의 교양 과목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과학기술 시대의 교양 교육에는 과학기술이 완벽하게 스며들고 녹아들어 가야만 한다. 과학기술 시대의 교육은 특정 분야의 전문성만 강조하는 ‘전사(戰士)’가 아니라 폭넓은 학문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 함께 전문성을 강조하는 ‘기사(騎士)’의 양성을 목표로 해야만 한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현대 과학적 자연·생명·우주관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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