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르카의 서간문 〈방투산 등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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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르카의 서간문 〈방투산 등반기〉
  • 김효신 대구가톨릭대·비교문학
  • 승인 2024.03.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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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에세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1304.7.20.~1374.7.18.)는 중세의 말기이자 근대의 여명을 여는 전환기에 알프스의 산봉우리들을 늘 오르내리길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기에 알프스 산속에 깊이 들어앉은 수도원들의 지하 서고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옛 문헌들을 뒤지고 또 뒤지는 일이 가능했다. 옛 문헌을 찾아내면 바로 필사를 하고 고전 작품들을 현실로 불러오는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페트라르카다. 그리하여 고전복원의 전통이 페트라르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자신이 “고전 문헌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래서 고대문화를 근대에서 부활시키는 의미의 르네상스를 스스로 실천하는 최초의 르네상스인, “최초의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페트라르카는 단순히 “장서를 수집하기 위해 책을 모으는 것에 대해 경계하라고 말하며, 독서는 책을 ‘서가’가 아닌 ‘머리’ 속에 넣어야 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페트라르카의 방대한 독서량과 고전문헌 복원작업으로 얻은, 고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주요 저작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지만, 페트라르카의 고전에 관한 지식은 무엇보다도 그의 수많은 서한을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문주의적 영향력까지 잘 드러내고 있다. 

 페트라르카의 서간집을 단지 사상적 관심으로만 읽으려고 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서간집은 역사적 관심으로 보아도 귀중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그의 생애를 정리하기 위한 자료로서 전기적 가치도 매우 높다. 더욱이 예술적 관심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되어 있는 서한이 적지 않다. 게다가 페트라르카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도 그의 다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의 서간집은 귀중한 정보의 보고이다. 요컨대, 그것을 접하는 우리의 관심에 따라 그것은 여러 가지로 풍요로운 세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서간집의 페트라르카는 그때마다 자신과 그 삶을 솔직하게 피력하거나 혹은 상대의 문제에 대해 친지에게 말한다. 이러한 화법으로 쓰인 서간집은 구체적 문제를 둘러싸고 친근하게 친구나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이루어진 성실한 철학적 실천의 기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가 서한을 문학작품으로 쓰는 습관은 서간집 편찬을 계획했던 아주 오래전의 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지식인에 있어서 뛰어난 서한 작성 능력을 몸에 익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했다. 사실 당시의 공문서는 대개 서간체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인으로서 성속(聖俗)의 공무(公務)에 종사하기 위해서도 서한 작성 능력의 양성은 불가피했다. 젊은 페트라르카에게도 서한 작성은 중요한 문학적 자기 훈련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보낼 때는 그 사본을 떠서 보존하고 그 후에도 퇴고를 계속하는 습관은 꽤 젊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이런 이유로 페트라르카의 서한은 많든 적든 예술성을 지향하며 때로는 창작과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그러나 그것들이 진실로부터 멀다는 것을 의미함은 아니다. 아니, 뛰어난 창작은 종종, 생생한 사실의 나열보다 훨씬 더 진실을 잘 전달할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의 독자성이나 명성에 집착하는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내적 · 외적 생활을 상세하게 문장에 정착시켜서 후세에 전하고 싶어 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 그 삶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서한문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북방 유럽에서도 수사학의 한 분야로 구분할 정도로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중세의 ‘받아쓰기 기술Ars dictaminis’같이 공적인 서한문이 아니라 사적인 글이었고, 실용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인 장르로까지 발전하였다. 개개인의 서간집은 12세기에 가장 발전하였는데, 실제로 ‘받아쓰기 기술’의 보급은 이런 개인 서간집 발전에 저해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3세기부터 북방 유럽에서 행정가들, 관료들의 서한이 수집되기 시작하였고, 14세기 말에는 페트라르카와 함께 서간집에 대한 열망이 회복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그 이후 인문주의자들은 서한문을 마음에 드는 문학적 장르로 발전시켰다. 

 

알프스의 산들을 오르내리며 산속에 있던 수도원들을 찾아다녔던 페트라르카의 모습을 통해서 비록 7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산행과 더불어 삶의 반성 및 삶을 돌아보는 일이 행해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실제로 반성이나 자기 분석의 기록이기도 했던 페트라르카의 『친근서간집』 제4권 1, <방투산 등반기>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 새롭게 고민하는 페트라르카의 인간적인 모습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방투산 등반기>의 주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바로 “자연과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한복판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는 “페트라르카의 재발견”이 이 서간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페트라르카의 『친근서간집』 제4권 1의 서간문에는 <성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이며 신학 교수인 디오니지 다 보르고 산 세폴크로에게, 자신의 번뇌에 대해서 Ad Dyonisium de Burgo Sancti Sepulcri ordinis sancti Augustini et sacre pagine professorem, de curis propriis>라는 표제어가 붙어있다. 서간문에 <방투산 등반기>라는 제목은 실제로 붙어있지 않다. 이 <방투산 등반기>라는 제목은 후대에 번역가들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제목이다. 게다가 이 『친근서간집』 제4권 1의 서간문이 페트라르카의 서간문 중에서 유명세를 타다 보니, ‘친근감 있게’ <방투산에 올라서>라든지, 아니면 <방투산 등정> 등으로 제목을 달아서 인용을 많이 하였던 것이다. 『친근서간집』 제4권 1의 서간문은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 디오니지 다 보르고 산 세폴크로(Dionigi da Borgo San Sepolcro/ 보르고 산 세폴크로의 디오니지)에게 보내어진 것이다. 디오니지는 파리대학에서 공부한 뛰어난 신학자로 파리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이윽고 아비뇽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고 1338년경에는 로베르토 왕의 청으로 나폴리에 가서 왕의 고문이 되었다. 디오니지는 1342년에 죽었다. 그렇지만 그의 태어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의 관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과 그 삶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삶을 그는 집요하게 계속 문제 삼았다. 그러나 자연과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풍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페트라르카의 이런 면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가 <방투산 등반기>다. 방투산Mont Ventoux은 아비뇽의 북동쪽에 우뚝 솟은 해발 2천m 가까운 산이다. <방투산 등반기>에서 나오는 등반이 이뤄진 것은 1336년 4월 26일이다.

<방투산 등반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근방 가장 높은 산은 적절하게도 방투산(바람의 산)이라고 하는데, 나는 오늘 여기에 올랐습니다. 다만 유명한 고산 정상을 보고 싶다는 소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나는 오랜 세월 이 여행을 남몰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의 일을 조종하는 운명의 손에 이끌려 나는 어릴 적부터 이 지방으로 흘러 들어와 살고 있었고, 게다가 이 산은 널리 어디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 거의 언제나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페트라르카는 방투산 등반의 어려운 여정에 관한 장황한 해설을 하고 나서 “그러나 시인은 의미있게 노래하고 있습니다.”라고 시인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면서, “불굴의 노력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라는 베르길리우스의 『농사시집(農事詩集)』 제1권 145행의 구절을 인용한다. 이윽고 “해는 길고 대기는 상쾌하며 그리고 활기찬 정신, 강건하고 민첩한 몸, 그 밖에 모든 것이 이렇게 우리들의 등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걸림돌이 된 것은 단지 지세(地勢)뿐입니다.”로 등반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산골짜기에서 만난 노인이 “오십 년 전 같은 청춘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정상까지 올라갔”었다고 하면서 등반을 중지하고 돌아가라고 강력하게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거기에서 가지고 돌아온 것이라고는 단지 후회와 피로, 고달픔, 바위 모서리와 가시덤불에 갈기갈기 찢어진 몸과 옷밖에 없었다.”고 충고에 충고를 거듭한다. 그러나 시인 페트라르카와 동생 게라르도는 충고에 아랑곳없이 등반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노인에게 남겨두고, 홀가분하게 등반을 시작한다. 다음은 그 산을 오르내리는 시인 페트라르카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여, 전보다 천천히 나아갔습니다. 특히 나는 더 느린 걸음으로 느릿느릿 산길을 따라갔습니다. 동생은 지름길로 능선을 타고 척척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갑니다만, 저는 게으르게도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동생이 저를 불러 바른길을 가리키자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저쪽에 더 쉬운 오르막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멀리 돌아가도 좋으니 더 편하게 가고 싶다고. […]

페트라르카는 동생 게라르도와 출발했지만, 동생이 평탄하게 순리대로 오르내리는 것과 대조되게 힘든 오르막길을 피한답시고 내리막길을 택해서 더 힘든 길을 택하고, 더 편하게 쉬운 길을 택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착각을 계속 합리화시키면서 산행한다. 올라야 할 길을 제대로 오르고, 어차피 올라가야 한다면 오르막길을 마다하지 않고 올라가야 하거늘, 페트라르카는 당장 힘든 오르막길을 피하면서 즉흥적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마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두어 번 실패로 이제는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고 하면서, 또다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페트라르카는 동생 게라르도가 “지름길로 능선을 타고 척척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 대조되는 “게으르게도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방투산 등반에 동행한 동생 게라르도는 페트라르카와는 세 살 차이다. 형 프란체스코와 함께 몽펠리에와 볼로냐에서 공부했다. 아버지의 죽음 후, 형과 함께 아비뇽으로 돌아가서 역시 문학 연구와 시작(詩作)에 종사하고 진실한 사랑도 찾았다. 요컨대, 형과 똑같이 허영의 생활에 젖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진실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애인의 사망을 계기로 이제껏 시간과 돈, 열정을 바쳐왔던 모두를 버리고, 완전히 다른 인생의 행로를 택한다. 1334년에 카르투지오 수도회 수사가 되어 수도원 생활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그는 형이 열망하면서 끝내 도달하지 못한 평안의 ‘항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게라르도의 회심(回心)에 페트라르카는 강한 충격을 받는다. 아직 ‘폭풍’의 바다에 떠도는 자신의 삶과 ‘항구’에서 쉬고 있는 동생과의 삶의 대비는 1348년 게라르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세히 알 수 있다.(『친근서간집』 제10권 3). 등반기에 보이는 형제의 등산 모습의 대조도 동생의 수도원 입회와 그 후 두 사람의 생활을 생각하고 서술한 것일 것이다. 방투산 등반이 실행된 날짜가 앞서 얘기한 대로 1336년 4월 26일이고 보면, 이때는 이미 동생 게라르도가 카르투지오 수도회에 입회한 뒤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 앞서 등반하는 모습이 담긴 서간문 안에서도 동생과 페트라르카 자신을 대조 비교하는 의도된 복선은 시인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대조를 암시한다.

 

페트라르카의 “방투산 등정기는 픽션에 기초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견해도 있다. 혹자는 페트라르카의 등반이 “다만 유명한 고산 정상을 보고 싶다는 소망에 사로잡혀서” 실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아무런 실용적 동기를 찾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최초의 근대적 등산”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등산 동기를 묻는다면 그것은 순수하고 지적·심미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조망에 상상력을 북돋워 이 등산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자연으로 펼쳐진 이 미적 감성이나 지적 관심은, 그러나 페트라르카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열린 눈길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최초의 근대적 등산의 기록인 이 등반기는 실제로 반성이나 자기 분석의 기록이기도 했다. 사실, 거기에서는 자연에 대한 눈길과 내면에 대한 그것이 교대하여 서로 자극하거나 혹은 양자가 연결된다. 굳이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자연의 재발견과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재발견은 근저에 있어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방투산 등반 기록 시기보다 10년 앞선, 1326년 봄, 페트라르카는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면서, 볼로냐 유학을 그만두고 아비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한동안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생활하면서 문학 연구에 몰두하고, 자신이 말한 허영의 생활에 빠져든다. 그리고 다음 해 1327년 4월에는 젊은 유부녀 라우라Laura와 만나고 보답받지 못한 사랑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이 사랑으로 인해 페트라르카의 시 정신은 한층 고양되고, 잇따라 아름다운 연애시가 만들어져 간다. 이들 시는 허영의 삶의 최고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시인은 생활의 방편으로 직업을 얻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택한 생활의 방편이 세속의 생활을 접고 사제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26살 되던 1330년에 정식으로 사제가 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고전문학 연구와 속어시(俗語詩)의 창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연애나 세속문학에 대한 열정, 명성을 위한 욕망에 사로잡힌 허영의 생활에 대한 의구심(疑懼心)도 점차 고개를 들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면적 의구심이 작동하여 페트라르카는 동생과의 대조, 그리고 자신의 낙오하는 모습에 한껏 괴로움을 토로하면서, 스스로 자성의 말을 쏟아붓는다. 

그것은 보다 평탄하고 일견, 보다 편한 길이다. 하지만 네가 이 길을 더듬어 오래 방황할 경우에는 네가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쓸데없이 미뤄온 노고의 무거운 짐 아래 헐떡이면서 맑고 조촐한 행복의 삶으로 올라 갈 것인지 아니면 네 죄의 골짜기에 힘이 빠져 쓰러질 것인가이다. 그리고 만약 ― 상상만해도 전율을 느끼지만 ― 암흑과 죽음의 그림자가 너를 거기서 찾아낸다면 너는 끊임없이 심한 괴로움 속에 영원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성직자의 길을 택한 것도 그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에 자성과 반성이 보태어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였을 때 페트라르카는 디오니지를 알게 되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354.11.13 ~ 430.8.28)의 『고백록』이라는 소책자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시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이때부터 그의 내면에서는 허영의 삶을 지향하는 “도착(倒錯)되고 사악(邪惡)한 의지”에 대해 새로운 다른 의지가 반역(反逆)하기 시작한다. 적어도 이 시기를 전후로 그와 같은 페트라르카의 내면적인 변화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의 내면에서는 신구(新舊) 두 개의 의지 사이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힘겨운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볼로냐 유학 이후, 페트라르카에게 생긴 현저한 삶의 태도 변화는 신구(新舊) 두 의지의 싸움 바로 그것이다.

페트라르카는 내면적인 두 의지의 싸움 중에, 방투산에 올라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산 아래 펼쳐진 광경을 굽어보다가 문득 일종의 외경심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윽고 언제나 손에 갖고 다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꺼내어 읽을 마음의 동요를 인식한다. 

페트라르카의 <방투산 등반기>에 의하면 이것이 써진 것은 등정 날, 밤도 깊어 돌아온 산기슭의 시골 여관에서였다. 그런데 이 서간은 사실은 후년의 작품이고 거의 확실하게 1352년이나 1353년경의 것이다. 추정하건대, 첫째, 이러한 긴 서간, 게다가 잘 가다듬어 우아하고 단정한 문장을 하인들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짧은 시간에 피곤한 몸으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페트라르카 자신은 서간문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결치는 가슴에 이런 갖가지 생각이 오간 채 나는 길이 험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새벽녘에 떠났던 그 작은 시골 여관으로 밤도 깊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고맙게도 달이 밤새 우리 걸음을 도와주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오자 하인들이 저녁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나는 혼자 집 한구석에 틀어박혀 서둘러 그 자리에서 당신 앞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글쓰기를 미루면 장소가 바뀌면서 아마 기분도 변하고 쓰고 싶은 마음도 식어 버릴까 봐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등반기의 내용은 과연 지어낸 이야기일 뿐일까? 이 서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페트라르카가 방투산 정상으로부터의 조망에 상상력을 북돋워 실제로 등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 서간 역시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서간이 후년의 창작이라고 해도 많든 적든 등산의 실상을 떠올리면서 써진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부정할 근거도 없다. 그리고 자서전은 아무리 성실한 객관적 서술을 목표로 해도, 실제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짜’이면서 창작인 것이라고 해서 ‘진실’ 전달을 막는 것은 아니다. 

<방투산 등반기>도 역시 틀림없이 페트라르카의 ‘시와 진실’이다. 거기에 깃든 ‘진실’, ‘시’와 모든 ‘진실’을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이것에 궁금증을 갖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할 것이다. 이 ‘진실’의 앞에서는, 페트라르카의 등산이 실제로 1336년 4월 26일에 이뤄졌는지 아닌지의 문제도 몹시 빛이 바랜 것이 될 것이다. 어쨌든 등정이 이뤄진 것은 이날이 아닌 다른 날이라는 증거도 없는 것이다.

※ 졸고 「페트라르카의 서간문 <방투산 등반기> 소고」(『이탈리아어문학』, 제61집, 2020년)를 편집 수정한 글입니다. 

 

김효신 대구가톨릭대·비교문학

대구가톨릭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겸 안중근연구소 소장. 한국외국어대 이태리어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남대에서 국문학 박사(비교문학전공)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문화 그리고 문화적 혼종성》(2018), 《시와 영화 그리고 정치》(2014), 《한국 근대문학과 파시즘》(2009), 《이탈리아문학사》(1994), 《문학과 인간》(공저, 2014), 《세계 30대 시인선》(공저, 1997) 등이 있으며, 역서로 《나의 비밀》, 《고독한 생활》, 《종교적 여가》(2023), 《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2020), 《칸초니에레:51~100》(2020), 《이탈리아 시선집》(2019), 《칸초니에레:1~50》(공역, 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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