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에 맞서기, 비판적 언어감수성으로 일단 버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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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에 맞서기, 비판적 언어감수성으로 일단 버틸 것!
  • 신동일 중앙대·문화언어학
  • 승인 2024.03.17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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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지음, 필로소픽, 240쪽, 2024.02)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이강인과 손흥민 선수의 불화 사건이 터졌다. 이강인 선수가 사과하고 손흥민 선수가 용서하며 사건은 일단락된 듯 했으나 좀처럼 개인을 향한 거대 집단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누구든 침몰시킬 수 있는 미디어 권력의 영향력을 우리는 공포스럽게 목격해야만 했다. 제한된 출처만이 인용될 뿐이었던 보도기사가 수도 없이 반복되었고 수많은 가짜 뉴스가 태연하게 창궐했다. 이강인 선수는 파르마코스(희생양)가 되면서 모욕과 비난을 일방적으로 감수해야만 했다.

내가 주목한 건 이강인 선수뿐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를 단번에 덮어버린 미디어 텍스트의 위력이었다. 유사 텍스트가 반복적으로 보이고 들리도록 배치하는 오버워딩(overwording) 전략은 나치 정권과 같은 전체주의 권력이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프로파간다 기술 중 하나였다. 단순한 진술이라도 계속 보고 들으면 그걸 믿게 되는데 PR 커뮤니케이션에서 제품을 팔고 브랜드를 알릴 때 사용하는 화용 전략과도 다를 바가 없다. ‘무플보다 악플’이라도 끌어내려는 노이즈 마케팅, 또는 네거티브 선거전략은 여전히 광고나 선거 캠페인에서 유효한 전략으로 즐겨 사용된다. 이강인 선수에 관한 텍스트는 그가 비난받을 만하니 그런 말과 글이 생산되었다고 볼 것만 아니라 무비판적으로 축적된 유사 텍스트의 위력 때문에 이강인 선수가 비난받거나 용서받아야 할 선수가 된 것이기도 하다.

신간 《버티는 힘, 언어의 힘》에는 그와 같은 이강인 선수 사건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언어문화 비평이 여럿 게재되어 있는데 두 곳만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큰 집단이 개인을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공포적인 집단사회 〈폐쇄된 언어사회〉이다. 

“늘 불편하거나 두려운 장면이 있습니다. 힘센 집단이 개인을 곤궁에 빠뜨리는 장면이죠. (...) 난 큰 집단이 개인에게 겁주는 곳이 늘 싫었습니다. 그런 사회는 큰 집단이 제시하는 지침으로 개인이 존재 가치를 갖습니다(...) 소란스럽지만 거긴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위력적이면서 위험한 사회입니다.” (117, 119쪽)

또 하나는 한국 축구문화의 담론질서를 직접적으로 다룬 〈축구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 아니라 얽힌 텍스트들이 만든 담론의 효과일 뿐입니다(...) ‘태극전사’로 호명되는 선수들이 하나같이 결의에 가득한 표정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시합에 임합니다. 시합이 끝나면 미디어는 “우리 태극전사가 투혼을 발휘했다”며 감동과 감사를 전합니다. 선수들도 국민께 힘이 되었길 바란다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날짜만 가리면 이전 대회의 기사와 구분도 되지 않는 유사 텍스트입니다.“ (64쪽) 

”그리고 누구나 갑작스럽게 차별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만 두고 그걸 진짜라고, 혹은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그리고 나머지는 가짜거나 적의 음모라고) 계몽하고, 훈계하고, 담합하는 사회는 무서운 곳입니다.“ (65쪽)

이 밖에도 이 책은 일상에서 목격할 수 있는 갑질 고객의 언어폭력뿐만 아니라 서바이벌 오디션, 몰래카메라, 참교육 콘텐츠, 아이돌 스타의 90도 폴더 인사, 펜데믹 시대의 마스크 담론 등에서 나타나는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권위주의 언어문화를 고발한다.

펜데믹 시대만 보더라도 서로 다른 개별적인 삶을 무참하게 제한시켰고,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면서 이항대립의 사회구조를 선명하게 구축했다. 그런 중에 언어와 기호에 관한 인문적 지식, 또는 비판적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우리 개인에게 어떤 유익함이라도 있을까? 이 책은 온전한 자유를 찾고 서로를 배려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경로가 있겠지만 우리가 권위주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체계를 비판적으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성과 자유의 가치를 빼앗고 온전하고 사랑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관계성을 왜곡하면서 지배적인 권력에만 몰입하게 하는 핵심적인 장치가 언어로부터 영리하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언어를 매개로 자유와 사랑이 위축되고 박탈된 것이라면 그런 언어에 관한 비판적 감수성을 복원시켜야만 반지성적이고 폭압적인 언어사회에 저항과 대안을 모색해볼 수 있다. 어린 학생이든 어른이든 배타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언어에 민감성을 가질 때만 자유를 되찾고, 사랑의 관계를 선택하며, 지배적인 문화 풍조에 맞설 수 있는 자아정체성을 꿈꾸게 된다. 그런 점에서 비판적 언어감수성 교육은 경계 짓기, 타자성을 향한 폭력, 경쟁과 위기에 관한 불안감이 가중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를 함께 지키는 시민교육으로 볼 수 있다.

미디어와 제도권 권력공간에 당위적으로 채워지는 텍스트에 대해 비판적 감수성을 갖고 그로부터 자기변화를 갖자고 하면 그건 고작 ‘자기의 포이에시스’로 향할 뿐인 낭만적이고 개별적인 윤리교육이라고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말만 모두가 하는 권위주의 사회에서 비판적 문식력을 갖추고 각자만의 고유한 언어를 찾아보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개별적인 실천의 합이 모이고 거창한 사회정치적 저항이 기획되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각자 선 곳에서 자기배려의 언어를 동원하면서라도 일단 버티어야만 한다. 

이 책에서는 자신만의 말과 글을 세상에 전하는 ‘싱어송라이터’ 인생, 비유와 상징의 언어를 체득하며 가능성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 자신만의 기호적 리추얼을 만끽하면서 담백하고도 자족하는 일상을 보내는 미니멀니스트 라이프스타일 등이 나열되어 있다. 그걸 모두 달라진 언어로 다른 삶을 사는 실제적인 예시로 소개한 것이다. 

 

신동일 중앙대·문화언어학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한국인이 ‘또 다른 언어’를 배우거나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적 상황을 개인의 결핍으로 보지 않고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탐구하는 언어감수성, 언어통치성 연구자이다. 언어차별의 경험과 부적절한 언어사용 관행을 다양성, 공간성, 횡단, 실용, 자유, 사랑의 가치로 점검하고 있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학제적인 연구를 수행했고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 《담론의 이해》, 《앵무새 살리기》, 《접촉의 언어학》 등의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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