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힘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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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힘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불과하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3.16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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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 샹탈 자케 지음 | 류희철 옮김 | 그린비 | 336쪽

 

한 개인이 부모 계급과는 전혀 다른 계급 집단으로 이행하는 현상, 특히 사회적 신분이 급격히 상승한 경우는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을 만들어 낼 정도로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다. 이 ‘비-재생산’의 사례는 그 예외성 덕택에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바로 그 예외성 때문에 제대로 분석된 적이 없다. 계급을 바꾸는 일은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사건이고, 학술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특출난 개인의 출세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계급의 상승이동에 불리했는데도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룬다면, 더구나 동일 환경에 처한 다른 이들은 여전히 그 환경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과연 한 개인의 능력과 불굴의 의지 외에 대체 무엇을 비-재생산의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성공한 이유가 정말로 그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비범한 능력과 꺾이지 않는 의지에 있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해서 그러한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저자 샹탈 자케는 이 책에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언어로 우리를 비-재생산 문제 탐구로 초대한 후 이를 본격적으로 토론하도록 유도한다.

계급을 바꾼 이들을 지칭하는 명칭이 전향자나 탈락자, 그도 아니면 벼락부자라는 등의 가치 평가적인 단어를 제외하면 전무하다는 사실은 비-재생산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을 여실히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무관심은 결코 중립적인 태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자수성가한 인물들’의 존재가 계급적 기준에 따른 사회적 선별을 개인의 능력에 따라 정당하게 자원을 분배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능력주의 신화의 선전물로 활용되는 상황에서 비-재생산 현상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기성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비-재생산 사례에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케의 분석은 현재의 사회적 질서 내에서 과연 어떤 조건들이 결합되었을 때 실제적 변화가 생겨나는지, 또한 사회 내에서 무수히 길항한 것들이 한 사람의 기질 안에서 맞부딪혔을 때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 보여 줄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케는 스피노자의 ‘이해하라’(intelligere) 원칙에 입각하여 고전 철학의 분석 도구들을 활용하면서 출신 계급을 떠난 사람들을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자라고 쉽사리 비웃거나 배신자라고 미워하기보다는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재생산과 비-재생산을 결정짓는 사회적 힘의 관계를 사유하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자케는 먼저 비-재생산의 사례들을 중립적으로 기술해 줄 수 있는 학술적 용어로 ‘계급횡단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나아가 쟈케는 계급횡단자들이 생겨나기 위한 진정한 원인에 관해 분석하기 시작하는데 단순히 한 개인의 능력이나 야심을 계급횡단자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넘어서서 사회적 비-재생산을 낳는 데 공동으로 작용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가족, 개인적 원인을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는 곧 계급횡단자의 기질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계급횡단자 개인의 독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질이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한 이해의 노동은 곧 그가 그 자신으로 직조되기 위한 원인의 복잡다단한 계열을 분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가족이나 사회적 환경 내에서 그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 감정들의 작용과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성적, 인종적 차이가 비-재생산과 관련하여 수행하는 역할을 탐색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 탐색이 드러내어 보여 주는 여러 원인의 복잡다단한 상호적 얽힘이 없다면 계급횡단의 사례는 발생할 수 없다. 어떤 원인도 단독으로는 비-재생산을 일으킬 만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계급횡단자를 발생시키는 조건인 복잡다단한 인과 규정의 연쇄를 도외시한 채, 계급횡단자 혼자의 힘으로 어떤 성공을 거머쥐었으며 우리 사회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고 충분한 능력만 있다면 그 능력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부여하는 공정한 사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불과하다.

계급횡단자 개념으로 사회적 비-재생산을 사유하는 작업은 비판철학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비록 계급횡단자나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따라야 할 행동 규범을 세우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비-재생산 현상에서 은폐되었던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기성 질서에 관해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강제적 이성애 규범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동성애자로서 정체화한 사람은 성적 비-재생산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일반적 법칙에서 빠져나간 독특한 것을 사유하려는 노력은 어떤 의미로든 ‘정상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오히려 정상성의 용어로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데 불편을 느끼는 ‘검은 양’들이 조금 더 적합한 방식으로 자기 이해를 시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각자는 자신이 바로 지금의 그러한 자기 자신으로 직조되기 위해 필요했고 또한 필연적이었던 복잡다단한 인과 규정의 계열에 대한 사유함으로써 정체성 개념을 넘어서서 더욱 깊숙하고 철저하게 스스로에 대해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체성 개념이 의미를 가진다면 특정한 정체성이 특정한 기준에 따라 부과될 때가 아니라 이런저런 정체성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독특한 것을 사유하는 것이 가진 보편적 가치는 샹탈 자케가 이 책을 ‘모든 계급횡단자’에게 바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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