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殷周) 혁명과 화하(華夏) 문명의 재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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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殷周) 혁명과 화하(華夏) 문명의 재창조
  • 홍상훈 인제대·중문학
  • 승인 2024.03.1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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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상나라 정벌: 은주殷周 혁명과 역경易經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936쪽, 2024.02)

 

역사, 특히 상고사(上古史)라면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된 서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미 상식이다. 다만 서사의 내용이 최대한 객관적인 합리성에 근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절한 자료가 우선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상고시대의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를 서술하는 데에 풍부한 고고학 자료와 갑골문(甲骨文)에 관한 연구 자료가 확보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바탕이다. 물론 어떤 자료를 활용하든 간에 서사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서술자의 의도에 따른 구체적인 기획일 것이다. 《상나라 정벌: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리숴[李碩]의 《전상(翦商)》은 이런 조건에 잘 부합하면서도 심지어 ‘문학성’까지 풍부한 저작이다. 번역서로 934쪽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이 제시하는 주요 내용은 대략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상당히 잘 조직된 사회 제도와 문물, 특히 문자를 확보한 상족(商族)의 나라는 물질적으로는 상당 수준의 ‘문명’을 갖추었으나 정신적으로는 신권(神權)에 복종하여 술에 취한 채 인신 공양 제사를 지내는 광기가 만연한 야만성에 젖어 있었다. 이런 상족의 나라를 지탱하는 데에 현실적인 토대가 된 것은 청동으로 제작한 강력한 무기와 마차였고, 이를 통해 그들은 주변 부족을 정벌하여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자연스럽게 봉건적인 국가 체제를 형성했다. 

서부의 미개한 강족(羌族)의 일원이었다가 따로 독립한 주족(周族)은 상족의 고급 문명을 동경하면서 안정적인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상족의 나라에 ‘방국(邦國)’이 되어서 동족이었던 강족을 사냥하여 은도(殷都)에 인간 희생으로 바쳤다. 그 와중에 문왕의 부친인 계력(季歷)이 은도에서 살해당하고, 심지어 장자인 백읍고(伯邑考)는 인질로서 주왕(紂王)의 수레를 몰다가 결국에 인간 희생으로 바쳐졌는데, 문왕은 육장(肉醬)으로 담가진 백읍고의 살을 먹어야 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 자신이 인간 희생의 후보자로서 유리(羑里)의 옥에 갇혀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돌아온 뒤로, 문왕은 강상(姜尙)과 협력하여 주변 부족과 연합하며 힘을 기르고 ‘천명(天命)’을 받아 왕으로 자처한다. 

《역경(易經)》은 그런 그의 경험과 상족 정벌의 기획을 은밀히 담은 책이었다. 문왕의 뜻을 계승하여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목야(牧野)의 들판에서 주왕과 대치했던 무왕은 상나라의 내부 분열 덕분에 은도를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후 주공의 주도로 상족 집단을 해체하고 인신 공양 제사의 악습을 폐지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주공은 주왕의 궁중에 남은 갑골문 기록을 없애고 주족 전체에 만연했던 인신 공양 제사의 악습을 주왕 개인의 죄악으로 한정시켰으며, 그와 동시에 주족의 어두운 과거까지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전상(翦商)’이라는 단어의 뜻에 부합하도록 상족 자체의 역사 기억과 야만적인 문화를 철저히 정벌하여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그 대신 그는 ‘덕(德)’에 입각한 새로운 윤리 체계인 예악(禮樂)을 정비함으로써 새로운 ‘화하(華夏)’ 문명을 창시했다.

사실 갑골문의 해석을 통해 학자들은 이미 상족의 인신 공양 제사 풍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은허(殷墟)에 대한 고고학의 발굴 성과는 그 범위가 놀라우리만큼 광범했고 잔혹했으며 심지어 식인의 증거까지 있음을 밝혀냈다. 리숴는 그 과정을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게 재구성하여 소설을 쓰듯이 서술해 냈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과 가설들이 상당히 합리적인 증거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벼농사를 기반으로 풍요를 누리면서 청동기 기술을 개발했으나 평화로운 삶을 추구했던 얼리터우[二里頭]-하 왕조의 존재랄지, 물소를 몰고 유랑하며 부족 간의 무역에 종사하던 상족이 다른 부족들과 연합하고 얼리터우의 청동기 제작 부족과 내통해서 하 왕조를 멸망시켰으리라는 추정, 《봉신연의(封神演義)》로 대표되는 후세의 소설에서 사악한 여우의 정령으로서 주왕의 죄악을 부추기고 잔혹한 형벌을 발명해낸 존재로 묘사된 달기(妲己)가 사실은 상족에게 복속한 소씨(蘇氏) 부족의 여인으로서 문왕을 죽음에서 구해 준 은인이었으리라는 추정, 먹던 밥을 뱉고 현자를 맞이했다는 주공의 일화가 실제로는 형의 살로 담근 젓갈을 먹은 정신적 충격으로 생긴 후유증이었으나 과거사를 모르는 후세 사람들이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서(尙書)》를 비롯한 고대의 전적을 치밀하게 연구했던 공자가 자기 조상들의 이런 흑역사를 간파했음에도 주공의 배려에 감사하고 그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역사 왜곡을 강화했으리라는 추정 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설득력을 담고 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인간이 ‘이야기하는 동물(storytelling animal)’이라고 했다. 그리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어서기 위해서라고 했다. ‘은주 혁명’에 대한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가 보면, 주공으로 대표되는 주족은 상족의 야만적인 문명을 혁파하고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기억을 왜곡했으나, 실제로는 상족이 개발한 청동기와 마차와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계승하면서 분봉(分封)의 정치 체제와 문자, 종교 관념을 이어받되 새로운 요구에 따라 적절하게 변형한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리숴의 이야기 속에서 상족의 신으로서 피의 향연을 즐기던 상제(上帝)는 《시경》의 노래에서 주족의 존엄하면서도 인자한 수호신으로 바뀌고, 다시 주나라의 역사가 축적되는 과정에서는 그 신성(神聖)마저 퇴색하여 개념조차 모호한 ‘하늘[天]’로 바뀌게 된다. 이야기하기 자체가 재료들을 의도적으로 재구성하는 서사 행위이고, 그러므로 실제로는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일 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지금-여기’의 장애들을 넘어서 어떤 긍정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다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이른바 ‘은주 혁명’에 대한 리숴의 이런 설명은 중국 관방의 ‘상고사 설립(!)’ 기획과 맥을 같이하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흩어진 채 별개로 존재했던 고대의 부족들이 상족의 정벌 과정에서 서로의 존재를 더 넓게 인식하게 되고, 상족의 해체를 위해 주공이 시행한 강제 이주 정책과 족외혼의 효과로 새로운 ‘화하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논리는 현대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의 기조와도 본질적으로 상통한다. 물론 현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각 민족의 전통과 정체성을 최대한 보존하는 원칙 위에서 추진된다는 차이점은 있으나, 소수민족의 분열과 분리를 막아서 궁극적으로 ‘중화’라는 이름으로 통합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주 혁명’이 미개하고 분열된 종족들 위에 폭력적으로 군림하던 상족 왕조의 시대를 혁신하여 ‘덕’에 입각한 인문적 문명을 창조하여 진정한 ‘화하’ 문명을 창립한 쾌거라고 칭송하는 저자의 논리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리숴의 서사 역시 그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진행된 하나의 그럴듯한 서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아직은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있는 《일주서(逸周書)》의 서술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점이랄지, 《역경》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에 대한 몇몇 설명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도 한다. 또 ‘목야의 전투’에서 객관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주족 연합군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상족 내부의 분열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할 확실한 증거를 현재로서는 제시할 방도가 없다.

어쨌든 《상나라 정벌》은 확실히 흥미로운 역사서이자 소설이다. 이야기꾼의 기질이 풍부한 리숴의 서술 방식도 독자의 긴장을 유발하여, 긴 이야기임에도 순식간에 읽게 만든다. 지나치게 꼼꼼하고 진지한 독자가 아니라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 재미있는 서사에 담긴 ‘불순한(!)’ 의도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읽는 재미와 여운을 함께 품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역자에게는 모처럼 괜찮은 책을 소개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해 준 책이다.

 

홍상훈 인제대·중문학

인제대 국제어문학부 교수.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전통시기 중국의 서사론』, 『한시 읽기의 즐거움』, 『하늘을 나는 수레』, 『중국고전문학사 강해』 등의 저서와 『홍루몽』, 『봉신연의』, 『유림외사』(공역), 『서유기』(공역), 『양주화방록』(공역), 『시귀의 노래: 완역 이하시집』, 『두보율시』(공역) 등 중국 고전문학 관련 저작들을 꾸준히 번역·소개해왔으며, 더불어 인문학 분야의 명저 『증오의 시대』, 『생존의 시대』를 비롯해 『시간의 압력: 불멸의 인물 탐구』, 『왕희지 평전』, 『별과 우주의 문화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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