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경계, 변증적 과정, 그리고 다양성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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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경계, 변증적 과정, 그리고 다양성의 공존
  • 정채연 포스텍·법학
  • 승인 2024.03.1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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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세일라 벤하비브』 (정채연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130쪽, 2024.01)

 

세계화와 지역화가 전(全)방위로 펼쳐진 2000년대 초는 다양성과 이질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 태도, 즉 관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청되던 시대였다. 특히 ‘참여’는 그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였고, 시민운동과 시민단체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이전에 주변부로 비켜서 있었던 다양한 주장들이 정치 공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가 학생회장으로 출마하면서 선본 이름을 ‘톨레랑스(tolérance) ― 다양한 생각이 존중받는 공동체’로 고심해 정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제 간 연구로서 법인류학을 접하게 되었고, 법에서 다원주의를 수용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이론과 실천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학부 시절의 단편적인 고민과 문제의식을 필자의 학문세계 안으로 끌어온 셈이다.

이렇듯 법다원주의, 다문화주의, 관용, 그리고 세계주의는 필자가 기초법학자로 성장해 온 과정에서 대표적인 주제어가 되었다. 그간 이루어진 일련의 연구들은 법인류학적 다원주의의 관점에서 현대사회의 관용론을 재구성하고, 다문화사회의 사회통합 및 탈민족 시대의 세계주의를 구상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다. 이때 필자가 주되게 다루어 온 학자들은 하버마스와 데리다였고, 칸트 계몽철학의 유산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계승한 이들의 사상을 변증적으로 관련짓고자 하였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반성적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필자의 철학적 관점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렇듯 변증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세계주의와 다문화주의를 구상하고자 하는 여정에서 필자가 만나게 된 학자가 바로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이다. 현대 서구사회의 정치철학 담론을 이끄는 벤하비브는 튀르키예 태생의 유대인 혈통으로, 유대계 여성 이방인이라는 다양하고 중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배경은 그녀의 학문세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벤하비브의 정치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상적 줄기를 다문화주의와 세계주의로 보고 그녀의 핵심적인 이론, 개념, 관점을 해설한다. 구체적으로 다문화주의 이론이 기초해야 할 문화 관념인 ‘비본질주의적 문화’, 보편주의적 규범과 문화적 다양성이 양립할 수 있게 하는 ‘숙의 민주적 모델’, 세계주의적 규범이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변증적으로 수용되도록 하는 ‘민주적 반추’, 정치공동체의 성원과 비성원, 곧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기존의 경계가 민주적 대화 절차를 통해 재정립될 가능성을 열어 놓는 ‘국경의 다공성’ 등 벤하비브의 사상을 구성하는 열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이 책은 먼저 다문화사회에 대한 벤하비브의 진단을 살피고, 그녀의 다문화주의 구상에 있어 이론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비본질주의적 문화 개념과 정체성의 내러티브 모델을 풀이한다. 벤하비브는 문화를 명확하게 경계 지어진 한정된 총체로 바라보는 기존 다문화주의자들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문화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벤하비브는 문화가 대화성, 내러티브성, 그리고 경쟁적 논쟁으로 인해 내적으로 갈라지며, ‘우리’와 ‘그들’ 간의 경계를 계속해서 형성하고, 재구성하고, 재협상하게 된다는 변증적인 문화 이해를 제시한다. 또한 벤하비브는 유럽 및 북미와 같은 서구사회에서 펼쳐친 일련의 문화 주장들을 분석하면서, 공식적인 제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비공식적 사회운동을 통해 최대한의 문화적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숙의 민주적 모델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벤하비브는 헌법적·법적 보편주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치공동체에서 다문화적 갈등 및 충돌 상황을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벤하비브에게 있어서 숙의 민주적 모델은 보편주의적 규범 원칙과 다원주의적 문화 이론이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설득적으로 논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기본 전제라 할 것이다. 

벤하비브의 다문화주의 구상은 국가의 경계에 한정되지 않고 이를 넘어서는 세계주의와 세계 시민 사회에 대한 논의로 확장된다. 그 연장선에서 이 책은 세계사회에 대한 벤하비브의 진단을 영토성의 위기, 국제인권레짐의 형성, 시민권의 분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고, 그녀의 세계주의 구상에 있어서 사상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칸트의 세계주의적 권리와 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 그리고 이들의 논의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민주적 정당성의 역설을 검토한다. 나아가 세계주의적 지향점에서 보편주의적 인권과 민주적 주권의 변증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벤하비브의 세계연방주의적 시민권 논의에 있어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적 반추 관념을 해설한다. 

특히 인간의 이주 문제는 벤하비브의 철학적 기반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방인’의 존재는 고대 철학에서부터 진지하게 다루어져 온 주제이다. 세계사회의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난민, 망명자 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세계주의, 타자에 대한 윤리, 그리고 민주적 헌정질서에서 시민권 자격 등은 중요한 철학적 쟁점들이다. 벤하비브는 외국인, 이주민, 난민, 망명자와 같은 이방인의 보편적 인권을 국민국가의 민주적 헌정질서를 통해 구현해 내기 위한 이론적 바탕과 실천적 방안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벤하비브는 난민을 비롯한 이방인의 보편주의적이고 세계주의적인 인권의 보장과 공화주의적 연방국가로 조직된 정치공동체의 민주적 승인이 조화를 이룰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때 벤하비브는 칸트의 세계주의, 아렌트의 인권 이해, 하버마스의 대화윤리를 철학적 원천으로 삼아, 이들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데리다의 해체주의 및 문화이론 등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사유와 결합하고자 했다.

이렇듯 벤하비브의 학문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칸트, 아렌트, 하버마스, 데리다, 커버, 테일러 등 또 다른 대표적인 사상가들과 조우하게 되는 것 역시 독자에게 지적 흥미를 제공해 줄 것이다. 벤하비브는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철학, 사회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자신의 학문 세계로 초대하고, 이들의 논의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독자적 관점을 정립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도 변증적 사유에 정초해 있는 벤하비브의 학문적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적 다양성 및 혼종성이 점차 심화하고, 민족성, 종교, 인종, 언어 등 개별 특수한 정체성 간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은 세계주의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진지하게 요청한다. 21세기 초 이루어진 벤하비브의 세계사회와 다문화사회 진단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지난 20여 년 동안 점점 더 심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다문화현상과 사회통합,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의 보편적 인권과 시민적 주권의 변증을 아우르는 벤하비브의 정치철학은 세계주의 및 다문화주의 이론과 실천 간의 간극을 메우고 바람직한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기초가 될 것이다.

 

정채연 포스텍·법학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인문사회학부 대우부교수다. 고려대학교에서 법학사, 법학 석사,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대학교(NYU) 로스쿨에서 LL.M.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뉴욕주 변호사다.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미래전략대학원 연구조교수를 지냈다. 법철학, 법사회학, 법인류학 같은 학제 간 연구를 이론적 토양으로 해 법다원주의, 다문화주의, 관용 그리고 세계주의에 대한 기초법적 연구를 지속해 왔다. 최근에는 지능정보사회에서 인공지능과 지능로봇, 포스트휴먼, 블록체인 기술과 관련된 법이론적 쟁점에 주목하고 있다. 저서로 ≪코로나 시대의 법과 철학≫(공저, 2021), ≪법의 딜레마≫(공저, 2020), ≪법학에서 위험한 생각들≫(공저, 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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