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교육과 융합 교육 … 융합은 방법인가 목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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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육과 융합 교육 … 융합은 방법인가 목적인가?
  • 박유정 대구가톨릭대·철학
  • 승인 2024.03.10 1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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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융합이 대세다. 엊그제 있었던 전체 교수회의에서도 ‘퀀텀 점프’라는 말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우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네 단계의 융합 교육 과정을 가리키는데, 그 가운데 퀀텀 점프라는 말이 일반 명사가 되었다고 한 발언이 귓전을 맴돈다. 이제 융합은 단순히 학문 간의 통섭을 넘어서 우리 시대의 흐름, 곧 포스트모던 시대의 아이덴티티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2022년 11월 연구년의 기회로 독일을 방문하였다. 초청되었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야스퍼스 연구소는 의사이자 심리학자로서의 야스퍼스의 초기 연구를 기념하여 수립된 정신 의학 연구소였다. 이는 현상학을 기치로 철학과 의학의 학제적 융합을 꾀하는 연구소였고, 화요일마다 열렸던 세미나에서 목도한 것은 영미의 인지 심리학이나 심리 철학에 가까운 과학주의적인 연구 경향이었다. 물론 그것은 몸의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가 자신의 철학에 대한 근거로서 초청 교수였던 토마스 푹스와 그의 동료 교수의 정신의학적 연구를 원용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현상학적인, 즉 철학적인 연구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내 전공인 해석학의 대가 하이데거의 절친이자 멘토였던 야스퍼스를 발견하기 어려웠고, 하이데거의 수제자 가다머가 말년까지 머물렀던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는 그들의 자취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23년 1월 독일 남부 프라이부르크 대학을 잠시 들렀었다. 출국 전에 이미 하이데거의 학문이 탄생한 그곳을 방문하고 싶다고 철학과 안드레아스 교수를 통해 요청한 터였었다. 그날은 유독 기차가 고장이 나서 중간에 내리는 바람에 어렵사리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그때 안드레아스 교수는 대학 교육, 특히 철학 교육에 있어 융합 교육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드러내셨다. 하이데거의 연구실을 연상케 하는 유럽풍의 고색창연한 그의 연구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하이데거 연구자를 궁금해 하는 교수의 순수한 환대 속에서 불거진 뜻밖의 말씀이었다. 말씀인즉슨 독일의 대학도 융합 교육의 트렌드에 함몰되어 논문 심사를 가면 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싸우다 온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공계열과 달리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그러한 융합의 대상이 아니고, 융합에 휘둘리지 않고 학문적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곳은 독일에서는 프라이부르크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시처럼 아름다운 독일어 편지를 보내시는, 하이데거와 니체를 연구한 매력적인 교수님과의 만남에서 의외로 융합이 갖는 서슬 퍼런 이면을 맞닥뜨린 까닭에 잠을 설쳤더랬다. 무엇보다 내가 초청받았던 야스퍼스 연구소는 융합 교육을 추구하는 전형에 가깝지만, 학문의 성격상 학제적 융합을 내포하는 해석학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융합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귀국 후에도 온라인 강연이나 강의를 통해 경험한 독일 대학의 분위기에서 융합은 학문 간의 통섭을 넘어 그들의 학제와 교수의 인사 행정에까지 파고든 실용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지평 위에서 피어난 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융합은 독일과 같은 구미 선진국을 위시한 전 세계적 흐름으로서 포스트모던의 시대 정신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비판의 각도로 성찰해야 할 사안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융합은 우리 시대가 이념이 확립되어있는 안정기가 아니라 기존의 이념에 대한 불신이 일어나 새로운 이념을 찾아가는 이행기임을 드러낸다(조동일,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지식산업사, 2001, 19쪽 참조). 즉 근대와 같은 안정기에는 학문성 혹은 전문성을 위해 학문 간 분열과 독립이 일어났다면, 그러한 학문 간 경계 설정이 무의미해지고 해체된 오늘날과 같은 이행기에는 학문 간 융합과 통섭이 역사적 필연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융합이 단순히 이공계열의 학제적 문제가 아니라 물리학에서의 불확정성 원리와 수학에서의 불완전성의 원리로부터 혁명적으로 선포된 인간 지성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계된 문제임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융합의 문제는 변증법과 유사한 문제 상황에 놓여 있다. 역사적으로 변증법은 헤겔에 이르면 그것이 방법론인지 세계관인지 양단간에 구분할 수 없게 철학적으로 심화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융합 또한 그것이 교육의 방법인지 그 목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문제의 지평을 노정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방법인가 하면 목적이고 목적인가 하면 방법이 되는 물고 물리는 관계가 융합에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매듭을 잘라버리는 알렉산더 대왕의 용단이 아니라 양자를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박유정 대구가톨릭대·철학

부산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대학 인문학연구소에서 Post-Doc. 과정을 연수했으며,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강의 전담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프란치스코 칼리지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 연구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우수논문 사후 지원을 받았던 「하이데거 예술론의 헤겔 수용과 비판」이 있고, 문학과 예술 및 철학의 해석학적 탐구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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