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노량〉의 퇴행적인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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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노량〉의 퇴행적인 역사인식
  • 김종준 청주교대·한국사
  • 승인 2024.03.0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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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

 

2022년과 2023년, 김한민 감독이 역대 최대 관객수를 자랑하는 <명량>의 후속작으로 <한산>과 <노량>을 연이어 선보였다. 이순신을 다룬 3부작 역사영화의 영화사적 성과를 인정하며 역사학자로서 몇 가지 감상평을 써보고자 한다. 일단 <한산>에 대한 평은 <명량>보다 좋은 듯하다. 평론 중에 '듣고 고칠 줄 아는 영리한 감독'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국뽕, 신파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읽힌다. 김한민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모호하지만 자신감 있게, '국뽕'을 넘어선 '국뽕'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진정성'을 봐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한산>은 좀 더 세련되어진 국뽕 영화다. 필자도 <한산>이 <명량>보다 잘 짜여져 있고, 해상전을 관람하는 쾌감이 상당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명량> 이전 작인 <활>에서 보여주었던, '외세의 잔혹함 속에 내팽개쳐진 민초들의 치열한 생존 의지'는 여전히 찾아볼 수 없었다. <한산>은 <명량>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위기를 초연하게 극복한 민족 영웅'의 서사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는 영웅 서사를 부각시키는 양념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한산>이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항왜의 질문에 이순신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싸움입니까?"
"의 대 불의의 싸움이다."
"나라 대 나라의 싸움이 아닙니까?" 
"아니다"​


임진'전쟁'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용법 속에 당대 유학자들의 세계관이 들어 있다. '우리'만이 '정의'라는 배타적, 종교적 근본주의가 화이론적 중화 세계질서를 낳았다. 이에 순응하는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이 불의에 맞서는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한 배타적 정의관은 한말 '의병' 운동에서도 일정하게 계승되었다. 근대 이후 만국공법 하에 주권 국가 간의 조약이 체결되고 국가 대 국가 간 힘의 논리 속 생존 투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조선 지식인들은 '의'와 '불의' 타령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인의 시점으로 감정이입하여 '의'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 자체는 역사학적으로 좋은 방법이다. 김한민 감독이 단순히 조선 시대 세계관으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적으로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면 위의 대화에서 대사 하나를 더 덧붙여야 했다. 바로 '우리만이 '의'롭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 하나만 추가로 던져졌어도 필자는 감독의 진정성에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근래 한국 역사 영화 감독들은 나름 역사인식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면 극중 김원봉이 암살단을 조선에 보내며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테러활동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숭고한 행위라고,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결론부터 말하는 것은 '성찰'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어서 <노량>이라는 영화에 대한 관객평을 보면 관람이 끝난 후에도 북소리가 계속 귓가에 남으면서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는 이들이 많았다. 필자도 국뽕을 넘어선 애도의 정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보았지만, 역시나였다. 특별한 군사작전 전략이나 민중과의 접촉점도 없이 그저 응원의 북소리로 적을 물리쳤다는 설정은, 2002 월드컵 때 붉은악마의 거리응원 덕분에 정신력으로 세계 4강을 이루었다는 자기도취를 연상시킨다. 그나마 거리응원 때는 대중들의 무정형화된 집단의식이 발생시킨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지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북소리 설정은 그저 박정희 정권 시기 성웅 이순신관을 21세기에 재생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이 영화에서 이순신을 바라보는 역사인식은 박정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실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현재 역사학계와 역사교육학계의 주류, 비주류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과 일반국민들 가릴 것 없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역사의식이 본질적으로 박정희 정권 시기의 그것으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한산>이나 <노량> 같은 영화를 보고 '민족의식'을 느끼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적 역사의식'의 소유자다. 집단에 대한 개인의 희생을 ‘당위적으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중세 유교주의와 근대 민족주의는 묘하게 접합된다. 이러한 영화에 대한 지식인들과 대중들의 평에서 확인되듯이,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이 '보수'로 가득차 있다고 하면, 이는 곧 우리 공동체 내에서 '진보의식'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관점'은 결국 현재의 '세계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들의 국뽕의식이 박정희 정권 시기의 막무가내식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나름 세련된 질문들이 던져진다. 이 전쟁은 도대체 무엇인가, '의'란 어떠한 것인가, 당대 일본과 중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떠할까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어설픈 질문은 던져지지만, 실제 생각의 여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비장한 북소리'처럼 결국 우리의 것이 가장 옳고, 우리 방식이 뛰어나다는 국수주의적 자화자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이야말로 민주주의 시대인 현재 한국사 교과서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 바로 그것이다. 현재의 검정 한국사 교과서가 좌경화되었다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그래서 틀렸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 시기의 국뽕적 역사인식 -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파시즘적 역사인식 - 을 세련되게 재생산하고 있을 따름이다.

 

김종준 청주교대·한국사

청주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대상으로 한 저작으로 『한국 근현대의 파시즘적 역사인식』(소명출판, 2023),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신구문화사, 2010),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의 관학아카데미즘』(소명출판, 2013), 『한국 근대 민권운동과 지역민』(유니스토리, 2015), 『고종과 일진회-고종시대 군주권과 민권의 관계』(역사공간, 2020) 등이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한국 근현대의 사회사, 사학사 및 역사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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