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학자의 삶과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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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학자의 삶과 윤리
  • 박병기 한국교원대·윤리교육
  • 승인 2024.03.0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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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우리 시대 학자의 위상

우리 시대의 학자는 어떤 존재자일까? 국어사전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는 학자는 말 그대로 학문을 연구하면서 일로 삼기도 하는 사람이다. 물론 다른 일을 하면서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고, 서양철학자 스피노자처럼 평생을 안경알 깎는 일을 하면서도 학문의 역사에 의미 있는 궤적을 남긴 사람도 꽤 있다. 20세기 서양철학을 이성에서 언어로 전회(轉回)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비트겐슈타인도 꽤 긴 시간을 ‘명예롭고 정직한 노동’을 위해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에게 학자는 대체로 주로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전공을 평생 연구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학문의 중심이 대학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20세기 이후 강화된 현상으로, 일제 강점기 왜곡된 형태의 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우리도 그 흐름을 받아들였다. 그 후 채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원하는 사람이면 거의 다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수준의 양적 팽창에 성공했고, 이제는 오히려 그 대학을 주체하지 못해 허둥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대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어야 할 학자들이 입학생 모집에 내몰리면서 ‘잡상인’과 동등한 취급을 받거나, 온갖 연구 부정행위와 성추행 등 파렴치한 범죄의 주인공들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고 있기도 하다.

다른 한편 우리 시대 대한민국의 학자들은 유난히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갖는 ‘실천적 지식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력 대선 후보의 캠프마다 변호사들과 함께 가장 많이 참여하는 직업군이 교수라는 사실이 그런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 중 하나다. 교수로 상징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적인 안목과 지식을 토대로 국가 수준의 정책을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는 일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고,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경우가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참여 비율 자체가 높다는 점과, 때로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할 정도로 과도한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이른바 ‘폴리페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교수들은 대체로 온전한 학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시대와 사회의 학자는 과연 어떤 존재자일까’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류 역사 속에서 학자는 대체로 직접적인 생산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하는 학문 활동의 결과를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건네주거나, 아니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과거제도를 통한 ‘학자관료’ 선발제도를 먼저 정착시킨 한국과 중국 같은 동아시아 전통 속에서는 후자가 대세를 이루었고, 귀족 중심의 정치 전통을 갖고 있었던 서구의 경우는 전자가 대세를 이루었다. 당시 이탈리아 유력 정치인에게 헌정하는 헌사가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 전통 속에서 퇴계와 율곡이 동시에 선보인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에서 성학(聖學)은 성리학임과 동시에 제왕학이었다. 성리학자인 관료가 세자의 스승이 되어 왕을 성리학자로 만들고자 했던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로 꼽히는 퇴계와 율곡이 모두 성학에 관한 책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시대 사람인 남명은 상소와 교육을 통해 물러나[處] 정치에 관여하는 선비 모형을 보여주었다. 조선 정치에서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한 이후로 학자의 정치 참여는 수기(修己)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의무인 치인(治人)의 구체화였다.


우리 시대 학자에게 요청되는 윤리

우리 시대의 학자는 이런 동서양 전통의 학자 모형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 거의 온전히 차별화되는 지점도 보유하고 있다. 그 지점은 바로 우리 시대의 학자도 정치인 등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시민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학자에게도 먼저 시민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과 역량이 요구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주로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특정한 역할을 한시적으로 맡은 시민들일 뿐이고, 학자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이유로 학자들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우선 시민으로서 최소도덕이다. 다른 시민을 불필요하게 불편하게 하지 않는 예의 또는 에티켓과 경쟁 과정의 공정성으로서 정의,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그것이다. 이런 공정성과 배려라는 기준은 당연히 자신과 타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일관성을 전제로 한다. 그다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 관련되는 최대윤리는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의 문제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학자는 자신의 삶을 잘 이끌어가는 모형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학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고,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 등 전문직들에게 요구되는 전문직 윤리가 바로 이 지점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기대 수준과 대우에 상응하는 역할 도덕성과 전문직 윤리가 더해진다는 의미다.

조선 시대가 끝나는 시점에 그 사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선비였고, 그들은 문반과 무반을 포함하는 양반이라는 높은 신분을 보장받았다. 그 신분에 맞는 윤리가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도덕적·정치적 의무로 주어졌지만, 실제로 그런 모형을 보인 사람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모형이 될 만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고, 신분제의 와해와 함께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와 윤리가 자리잡아야 했음에도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반 시민만도 못한 이른바 상류층의 부도덕함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학자는 어떤가? 시민들의 기대 속에는 분명 이런 혼란상을 극복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주체가 학자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대학교수에 대한 인정 지수가 많이 낮아졌고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인식은 더 낮아져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학자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까지 무너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학자들이 하는 일이 주로 연구이고 그것에 더해 교육과 사회봉사가 주어진다는 전제를 확인하면, 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윤리는 연구윤리이다. 연구윤리는 다시 표절과 같은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지의 도덕과 세상을 보다 밝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권유의 윤리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는 권유의 윤리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고, 이 윤리는 자연스럽게 사회봉사 영역과도 연결된다.

교사 또는 교육자로서 교수는 그에 걸맞는 전문직윤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요구와도 마주하게 된다. 우리 시대 학자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경시되거나 무시되고 있는 영역이다. 언젠가부터 대학 강의 기법과 같은 방편 차원의 기능에는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대학에 근무하는 교사로서 교수가 어떤 윤리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 

뇌과학자들은 유전자 수준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 동물과 인간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뇌의 배선 양태임을 밝혀냈다. 송아지가 태어나서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 이내인 데 비해, 인간의 아기는 거의 일 년 이상이 걸리는 이유가 바로 아기의 뇌가 배선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배선은 의미 있는 타자와의 관계 같은 환경과 유전자가 격렬하게 소통하면서 완성되고, 그것이 일차적으로 완성되는 데는 25년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사실은 대학생의 뇌도 아직 완성되기 이전의 상태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뇌과학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대학교육을 다시 성찰해 보아야 하고, 특히 교양교육이 더 의미 있게 배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학 교양교육은 지성과 감성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전제로 일차적인 인격 완성을 목표로 삼아 실시되어야 하고, 그 인격은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와 자질, 역량을 당연히 포함하는 개념이다. 동시에 학부 수준의 전공교육은 자신이 선택한 전공의 학문이 자신의 삶은 물론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또 맺을 수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런 요청들이 우리 현실 속에서는 불행히도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 시대 학자도 시민이고, 동시에 이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회의존적인 존재자이다. 그런 점에서 빠름과 밝음만을 절대시하면서 그것과 늘 함께해야 하는 느림과 어둠의 미학은 적대시하는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에게는 빠르게 뛰고 나면 반드시 느리게 걷거나 앉는 시간이 필요하고, 밝음에 오래 노출된 이후에는 암막커튼에 의존해서라도 잠을 청하는 깊은 어둠의 침잠이 필요하다. 학자는 자신의 전공을 기반으로 이런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전문직으로서 혜택을 누리는 만큼 그 전문지식으로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기를 바라는 사회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자유주의를 전제로 하는 시민사회에서 이런 윤리적 요구 또는 요청들은 과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유주의도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이나 레너드 홉하우스 같은 유수한 자유주의철학자들의 전제를 고려할 수 있다면, 학자를 포함한 우리 시대 모든 시민들은 당연히 금지로서의 도덕은 물론 권유로서의 윤리에도 유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윤리는 도덕과 연결되면서도 보다 나은 삶을 향하는 열망을 주로 가리키는 개념이다.

또 한 학기를 시작하는 길목에 서서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교수 생활과 예측하기 쉽지 않은 학자 생활을 거리를 두고 성찰해 보고 싶어진다. 시대와 사회 상황이 녹록지 않고 몸이 보내오는 몇 가지 신호들로 내게 남은 시간을 헤아리는 겸허함이 함께하고 있다.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우리 시대와 사회를 걱정하는 우환의식(憂患意識)을 떨쳐버릴 수는 없는,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작은 학자로서 나는, ‘지금 이곳’이 지니는 미래와 과거로의 연결고리를 전제로 성실과 배려를 담아내는 따뜻한 하루를 살고 싶다. 

 

박병기 한국교원대·윤리교육

이 땅의 도덕교육과 시민교육을 중심축으로 삼아 보다 나은 삶과 사회를 모색하는 것을 주된 공부의 목표로 삼고 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를 거쳐 지금은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장과 교육부 민주시민교육자문위원장을 거쳤다. 최근 저서로는 <우리 시민교육의 새로운 좌표>(2020, 세종학술도서), <불교, 정치를 말하다>(2020, 공역, 세종학술도서), <철학은 시가 될 수 있을까>(2023,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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