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아트(PhiloArt) ··· 미래의 감성인류에게 ‘제3의 사유’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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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아트(PhiloArt) ··· 미래의 감성인류에게 ‘제3의 사유’를 말하다
  • 이광래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4.03.0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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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필로아트: 철학으로 미술을 읽다』 (이광래 지음, 책과나무, 409쪽, 2024.01)

 

 1.

빅-블러(Big-Blur) 시대의 화두는 해체와 융합이다. 해체와 융합은 시류(時流)의 주류다. 그것들은 한 켤레를 이루면서 미증유의 와류(渦流)를 만들어내고 있다. 블랙홀 같은 그 소용돌이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인류는 없다. 그 츠나미 속에서는 어떤 칸막이나 경계도 무의미하다. 국경조차 의미가 없다.  

해체가 반과거적이라면 융합은 친미래적이다. 해체가 과거로부터의 탈주라면 융합은 미래로의 질주이다. 해체가 지금의 시대정신이라면 융합은 미래의 지남이다. 신인류인 감성인류에게 해체와 융합은 전쟁이고 전략이다. 그것들을 위한 ‘제3의 사유’(La troisième pensée)가 곧 신인류의 조건이자 운명인 것이다. 저자가 ‘필로아트’를 미래의 신인류가 지참해야 할 행복의 전쟁기계로 간주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2.

PhiloArt(필로아트)는 저자가 Philosophy(철학)와 Art(미술)를 결합한 합성어다. ‘필로아트’는 철학자와 예술가가 추구하는 ‘사유의 공유지대’다. 이를테면 일찍이 메를로-뽕티가 『눈과 정신』에서 언급한 회화는 ‘말 없는’ 사유이고 철학은 ‘말하는’ 사유라는 주장 그대로이다. 또한 ‘필로아트’는 저자가 그동안 추구(追究)해 온 ‘열린 철학’의 얼개에 대한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이미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깡이 프로이트와는 달리 철학과 심리학을 통섭하며 구축한 자신의 정신분석이론을 ‘포스트철학’(Post-philosophie)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하지만 저자가 공부해 온 ‘필로아트’의 작업은 그와 다르다. 저자는 이제껏 정신분석학자가 아닌 철학자의 관점(안경)으로 미술, 건축, 문학, 무용 등의 예술정신에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들을 천착하고 그것들과 융합하는 철학의 구축을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술철학의 체계적이고 현학적인 이론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철학은 미술과 미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미술은 실제로 작품을 통해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가? 나아가 지금까지 미술은 철학과 문학 등 인문학과 어떻게 관계해 왔는가? 그것들에게 미술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 그리고 여기서’(nunc et hic), 즉 연일 수많은 작품들이 펼쳐지고 있는 미술의 현장에서는 어떤 철학적, 미학적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는가? 더구나 오늘날 ‘빅블러’(Big-Blur)의 와류로부터 누구도 헤어날 수 없는 미증유의 위기상황에서 철학과 예술(미술), 나아가 인문학은 어떻게 변신하며 적자생존해야 하는가?

저자는 우선 ‘필로아트’의 선이해를 위해, 제1부에서는 왜 ‘필로아트’를 제기하려는지를 비롯하여 20세기를 대표하는 메를로-뽕티, 바타이유,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이 본 벨라스케스, 세잔, 마네, 키리코, 마그리트 등의 필로아트’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본다. 제2부에서 저자는 거대한 시대적 와류로부터 탈주선을 모색하며 사유의 공유지대를 마련하려는 시도들을 찾기 위해 해체주의 시대의 철학과 미술, 작품과 제목과의 관계, 예술적 공리주의 등 몇 가지 문제들을 통해 ‘철학으로 미술읽기’를 시도했다. 제3부에서 저자는 반대로 ‘미술로 철학하기’를 도모하려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오늘날 쏟아지는 미술작품의 홍수 가운데 최근 국내에서 전시된 몇몇 국내외 필로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초대했다. ‘철학을 지참한 미술’(Art with philosophy)에 충실하려는 작품들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것들이 어떻게, 어떤 철학을 지참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독자와 함께 풀어 보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제4부는 초연결·초지능의 인공지능기술의 범람과 폭주로 인해 위기의 기로에 선 철학과 미술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저자의 진단과 예측이다.

철학자로서의 저자가 일찍부터 『미술철학사』(2016)의 출간에 이어서 나름의 철학렌즈로서 ‘필로아트’ 작업을 모색해 온 통섭과 융합을 니체의 『아침놀』(Morgenröte,1881)에서의 주장처럼 ‘나의 철학하기’를 위한 투쟁의 과정이자 저자가 구축하려는 열린 철학의 작업 그 자체라고 여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미술철학사가 나름의 포스트철학을 구축하는 기초 작업이었다면 ‘필로아트’는 그 위에 신축하려는 하나의 구조물이다. 한마디로 말해 ‘필로아트’(PhiloArt)는 철학, 역사, 문학을 망라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미술과의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모색하며 구축해 온 지(知)의 융합공간이다. 그것은 미술만큼 시대마다 다양한 사유가 모여들고 축적되며 논의되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미술이 곧 그 시대의 철학적 ‘사유의 저수지이고 예술적 사유의 델타’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또한 사유의 저수지이자 삼각주로서의 ‘필로아트’는 미술세상으로의 철학산보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저자가 그동안 진행해 오는 계면과 융합의 프로젝트 제목이나 다름없다. 그 점에서 ‘필로아트’는 저자의 『미술을 철학한다』(2007)의 비슷한 말인 동시에 반대말일뿐더러 『미술철학사』의 단면도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듯 저자는 삼천 년에 걸쳐 쌓아 온 강고한 철학동굴의 탈주방법을 어떻게 시연할 수 있을지, (특히 제4부의 제3장에서 보듯이) 철학의 그 동굴 밖, 니체가 “자신의 산 동굴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처럼 행동하라! 바람은 자기 자신의 피리에 맞추어 춤추고 싶어 하고, 바다는 그 바람의 발자국 아래를 떨며 뛰논다”고 말하는 ‘바람 부는 나의 바다’, 어디서 어떻게 철학과 만나는 것이 다중에게 조금이라도 이해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선 철학(이성)과 예술(감성) 양쪽의 접점을 어디에다 설정할지, 두 영역이 융합된 양태들을 제3의 방법으로 어떻게 생산해 낼지, 나아가 양자 간 사유의 공유지대를 어떻게 꾸미며 통합의 새로운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단서를 철학과 미술의 저수지를 비롯한 예술의 아고라에서 찾는 중이다. 저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함으로써 위기에 대한 ‘필로아트’의 대안적 청사진이 그려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3.

“나는 학자들의 위엄과 존엄 위에서 자느니 차라리 소가죽 위에서 자고 싶다. … 그들은 차가운 그늘 속에 차갑게 앉아 있다. 그들은 매사에 있어서 단지 ‘구경꾼’이 되려 한다. … 그들은 훌륭한 태엽장치이다. … 그들은 제분기처럼 절구공이처럼 일한다. …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될 수 있는 한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짜라투스트라의 말이다.

니체의 지적대로 철학과 사랑에 빠진 철학자들은 그것과 연애만 할 뿐 철학하지 않는다. 철학편집증에 빠진 이들일수록 그들은 철학으로 실상을 통찰하거나 그것을 세상살이에 적극 활용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면 그들은 철학이 세계에 대해 무엇이든 ‘말하는 사유’임에도 그것을 요술항아리 속의 보물인 듯 애지중지하거나 모든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라고 자위할 뿐이다. 하지만 철학을 애오라지 애지(愛知)의 목적으로만 삼는 이들은 ‘철학의 동굴지기’나 다름없다. 그들의 철학은 자신들의 철학경전들 속에만 있거나 철학설교에만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박물관의 도슨트이거나 철학도서관의 사서와 같은 에피고넨도 적지 않다.

메를로-뽕티도 첫 장의 제목을 ‘반성과 물음’이라고 붙인 유고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1)에서 철학자의 원죄를 양심선언하듯 고백한 바 있다. “철학자가 ‘명증함’(l’évidence)의 이름으로 세계를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학자를 변명해주지 못한다. 철학자는 인류에게 자신을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인간다움(l’humanité)을 더욱 철저하게 빼앗아버리기(dépossède)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메를로-뽕티는 ‘철학은 일종의 용어사전(un lexique)이 아니다.’라고까지 잘라 말한다. 철학은 알쏭달쏭한 수수께끼(énigme)나 논리적 변증으로 포장한 요설(妖說)처럼 철학자들이 저마다의 철학적 신념을 변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난해한 개념들의 과시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대중이 해독하기 힘든 난수표 같은 용어사전을 내밀며 아리송한 수수께끼로 인간다움을 빼앗으려는 철학자들의 무리에 동참하지 않으려한 까닭, 도리어 거기서 적극적으로 탈주하려한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허위의식이 낳은 가상(假像)이나 허상(虛像), 심지어 위상(僞像)의 자화상들은 철학자들의 성곽 안뿐 아니라 미술가들의 놀이마당에도 허다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말과 글로써 허위의식을 포장하려 한다면 부지기수의 미술가들은 단지 그럴싸한 눈속임이나 조형술만으로 철학의 빈곤이나 사유의 부재를 위장하려 한다.

눈속임(재현)의 위기를 인상주의로 넘어서면서 재현(구상)에서 표현(추상)으로 상전이를 시작한 현대미술에서 ‘추상’을 미명 삼아 온 위장이나 과대포장이 인상주의 이전의 원본재현 시대보다 심해진 까닭도 거기에 있다. 평면의 깊이감을 위한 ‘눈속임’(trompe-l’eoil), 즉 의도적인 착시(錯視)의 효과보다 관념이나 영혼(inner man)의 추상을 위한 ‘정신속임’(trompe-l’esprit)인 계획적인 착각(錯覺)의 유도가 훨씬 더 어려운 ‘필로아트’의 과정임에도 말이다.

저자가 원근법(단일시점)을 거부한 세잔을 통해 시지각의 현상학적 실재성의 문제를 포착한 메를로-뽕티를 비롯하여 여러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철학적 사유(철학하기)의 단서들을 발견한 바타이유, 푸코,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 등을 주목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예컨대 ‘철학으로 미술읽기’를 시도한 필로아티스트 바타이유는 마네의 작품들에서 ‘심오한 단절’(rupture profonde)을 찾아내며 그를 ‘현대회화가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 주는 세계의 탄생을 고한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에서 탈주해 미술에서 철학하는 사유의 저수지를 찾으려 한 푸코는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시녀들〉(1656)과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66)를 통해 이른바 고전주의 시대를 읽는 에피스테메를 찾아내어 ‘사물의 질서’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기도 한 철학자였다.

저자는 ‘말없이 사유하는’ 미술과 미술가들로부터 받은 필로아트에 대한 감응이 주로 메를로-뽕티, 바타이유,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로부터 받은 것에 못지않음을 말하고자 한다. 예컨대 장기간 권위로 군림해 온 회화의 규칙들을 위반(transgression)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이미지를 배반(trahison)함으로써 눈속임이 무엇인지, 나아가 회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실험해 보인 벨라스케스와 세잔, 마네와 마그리트를 비롯하여 리암 길릭, 리너스 반 데 벨데, 히토 슈타이얼, 박장년, 박석원, 송번수, 권여현, 우종택 등 오늘날 저자가 주목하는 국내외 미술가들이 보여주는 필로아트가 그것이다.

이처럼 철학의 역사이든 미술의 역사이든 역사는 크고 작은 위반과 배반이 가져온 상전이만을 찾아내서 그것들을 그 진화선상에 올려놓는다. 새로움의 기록들이 ‘위반과 배반의 사유’에 대한 보상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미 『미술을 철학한다』(2007) 이후 그와 같은 사유로 진화하는 미술의 역사를 ‘필로아트의 역사’로 간주해 온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미술가들이 보여 주고 있는 다양한 위반과 배반(새로움)의 시도와 흔적들을 그 일부라도 소개하려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광래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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