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있는 자들이 낙인찍는 주홍 글씨, 눈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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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있는 자들이 낙인찍는 주홍 글씨, 눈송이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3.02 1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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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꼰대들은 우리를 눈송이라고 부른다: 왜 예민하고 화내고 불평하면 안 되는가 | 해나 주얼 지음 | 이지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384쪽

 

20~30대 청년을 일컫는 명칭이 범람하고 있다. 88만 원 세대, N포 세대, 2030세대, MZ 세대, 알파 세대, 더 나아가 이대남, 이대녀까지.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일한 대상이 때에 따라서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세대로 규정된다. 시대의 짐을 짊어진 불쌍한 세대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대로, 기술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유능한 세대로, 깊은 젠더 갈등에 고통받는 세대로 입맛대로 그려진다. 도대체 우리 시대의 청년은 어떤 이들인 걸까? 그들을 구분 짓고 규정하는 기준은 타당한 것일까?

저자 해나 주얼은 해나 주얼은 눈송이 세대(snowflake)라 불리는 영미권 청년들을 분석하면서 이런 세대론의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간다. 강인하고 참을성 많은 기성세대와 달리 나약하고 예민하고 불평 많은 철부지 세대로 규정되는 눈송이 세대는 때에 따라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의 청년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특히 한국의 20~30대 청년을 한 세대로 묶고 그 명칭에 부정적인 의미를 담는 한국의 풍토는 눈송이를 멸칭으로 사용하는 서구 문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눈송이란 말의 어원을 찾고, 그 용어에 숨은 기득권의 문화와 정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해나 주얼의 시도는 우리의 가짜 세대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영국과 미국의 청년들은 어쩌다 눈송이로 불리게 된 걸까? 저자는 눈송이라는 말의 기원을 찾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하얗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결정체인 눈송이가 쉬 바스러지고 뾰족뾰족 불평만 많은 한심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은 백인우월주의와 반페미니즘을 표방하는 대안 우파 덕분이다. 이들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영국의 브렉시트 탈퇴가 결정된 2016년 이후 인터넷 플랫폼, 언론, 대학 강연, 대중 담론 등을 삽시간 장악한다. 

『콜린스 영어사전』이나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등재된 눈송이란 단어는 ‘나약하고 예민하고 쉽게 불쾌해하고 자신이 특별한 대우나 배려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는데, 구체적 현실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철회’를 외치는 대학생과 유색인, 여성, 그리고 젠더 구분에 혼란을 야기하는 성소수자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극우의 인터넷 밀실에서 나온 혐오 표현이 암암리에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파고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눈송이란 말이 단지 극우 세력의 전유물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나 주얼은 눈송이란 멸칭이 대중화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세력으로 진보 엘리트주의자, 기업 관리자 및 경영인, 트랜스 배제적인 급진 페미니스트 또한 빼놓지 않는다. 꽤나 리버럴하고 진보적인 체하지만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청년 노동자들이 주어진 노동 조건에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만 한다고 비난하는 이들, 이분법적인 젠더 구분에 혼란을 주는 트랜스인과 논바이너리인을 혐오하는 이들 모두 너무도 쉽게 눈송이란 낙인을 찍어버린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저마다 다른 위치에 있는 듯하지만, 이들은 부와 권력을 이용해 불편한 존재에게 눈송이란 주홍 글씨를 짊어지게 한다. 그렇다면 억울한 눈송이는 ‘나는 눈송이가 아니다’라고 외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상대에게 똑같이 눈송이란 낙인을 찍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해나 주얼은 이제 이런 진흙탕 싸움을 끝낼 때가 됐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사실 이 책에는 한국어 ‘꼰대’에 정확히 부합하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나이든 사람을 지칭하는 ‘boomer’나 ‘dickhead’, ‘arsehole’처럼 재수 없고 되먹지 못한 인간을 이르는 비속어가 눈송이 혐오자들을 이를 때 사용되는데, 이를 꼰대로 옮겼다. 요즘 젊은것들을 조롱하고,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강인함을 들어내는 꼰대는 이제 특정 연령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불편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나약하고 예민하고 유별난 행동으로 치부하는 꼰대 문화 속에는 젊은이들의 기세와 연대를 꺾고, 그들의 급진적인 발상을 짓밟기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다. ‘세상 물정을 몰라서, 경험이 부족해서, 고생을 안 해봐서’라는 말 속에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의 책임을 묻기 위해 연대하는 일련의 변혁을 위한 행동을 가로막는 힘이 작동하고 있다.

해나 주얼은 이렇게 말한다. “‘하! 거 봐라, 당신이 얼마나 예민한지!’라고 지적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종주의자, 등신, 편견 덩어리, 동성애 혐오자, 옅어지는 제 존재감을 되돌려 보려고 헛되이 발버둥치는 옹졸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잔인한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고 싶다고.” 멸칭을 당당히 자기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눈송이들의 도전은 퀴어를 퀴어로 당당히 받아들인 LGBTQ+운동을 연상시킨다. 꼰대 문화와 이를 교묘히 이용하는 정치 세력에 맞선 눈송이의 도전은 실로 아주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할 수 있다. “도대체 왜 예민하고 화내고 불평하면 안 되는가?”

중장년층이나 노년층과 대조되는 청년,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되는 청년은 쪼개고 갈라치는 분열 정치의 산물이다. 우리 시대의 청년은 어떤 이들이고, 그런 세대 구분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묻지 않는 세대론은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거짓에 불과하다. 어쩌면 해나 주얼의 이 책은 가짜 세대론의 문제를 냉철하게 직시하지 않으면 맞게 될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멸칭으로 불릴 것인가, 아님 우리의 이름을 되찾을 것인가. 도발적이면서도 유쾌한 눈송이들의 도전을 통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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