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 ‘재난문학론을 위한 시론(試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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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 ‘재난문학론을 위한 시론(試論)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3.02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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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30강_ 신형철 서울대 교수의 「21세기 문학의 흐름과 방향」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추이를 점검해보는 네 번째 섹션 ‘오늘의 사회와 문화’ 제30강 신형철 교수(서울대 영어영문학과)의 강연 중 서론과 결론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9·11과 3·11, 혹은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 ‘재난문학론을 위한 시론(試論)·1 -


신형철 교수는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줄 이야기를 찾는다”면서 지금 여기서 이른바 “재난문학을 논의 대상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21세기의 첫 사반세기가 일면 재난의 시대였다고 볼 만하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재난문학론 정립을 위한 또 하나의 시론(試論)”을 펼치는바, 크게는 재난을 앞에 두고 “‘사회적 연대’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창조”하는 ‘치유서사’와 “‘사회적 갈등’에 개입해서 그 근거를 해체”하고자 하는 ‘대항서사’로 나눈 다음 “21세기의 재난문학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학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는지를 물어보려”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2001년 ‘9·11 테러와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대상으로 해서 각각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그리고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과 다와다 요코의 『헌등사』라는 작품들을 통해 그 “연구 시각과 개념의 실효성”을 점검을 시도한다.  

 

지난 1월 27일, 신형철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3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재난문학의 두 층위, 치유서사와 대항서사

문학에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피폭 지역)가 있는가? 문학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믿음, 즉 문학은 유용한 것이라는 그 믿음의 성채가 무너져내려 폐허가 될 수도 있다면, 그런 일은 어떤 곳에서 일어날 것인가. 재난 현장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예술이니 뭐니 말할 상황이 아니다. 그것보다 우유와 가솔린의 확보가 소중하다. 이러한 사실에, 문예에 관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 내가 해왔던 일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정병호ㆍ최가형) 이처럼 현실의 그라운드 제로는 그대로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가 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문학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아니었던) 것이 되고 만다. 지금껏 사회적으로 받아온 대접이 근거 있는 것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문학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문학의 쓸모가 확인된다면, 문학은 언제 어디서든 작은 쓸모가 있다고 믿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난문학’을 쓴다. 

재난이란 무엇인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재난을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넓게 규정하고 이를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나눈다. 여기서 사회재난이란 인위적으로(인간에 의해) 일어났다는 속성을 가리키는데, 현대 재난사회학에서는 이 사회재난을 ‘기술적(technological) 재난’과 ‘갈등적(conflict-based) 재난’으로 분리하기도 한다(Drabek). 재난문학은 이와 같은 재난의 사실적 국면들을 반영하면서 쓰인다. 특히 중요한 재현 대상은 재난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속의 인간상이 될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 행동의 패턴은 현대 재난사회학의 주요 연구 분야 중 하나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그 학문이 정립되기 이전에 쓰인 소설 「칠레의 지진(Das Erdbeben in Chili)」(1807)에서 재난사회학의 핵심 논점을 선취해 보여주었다. 종교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불경한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있어 남자는 감옥에 있고 여자는 막 처형되려는 참인데, 그 순간 칠레 산티아고 대지진(1647년)이 일어난다. 재난 때문에 오히려 목숨을 건지고 해후한 두 연인은 생존자들의 공동체에서 지극한 배려를 받고 또 받은 만큼 베푼다. 모든 차이와 위계가 일시적으로 해체된 세상에서 인물들은 ‘천국’을 떠올린다. 그러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된 아이러니 앞에서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연인과 그들의 동료는 위험을 무릅쓰고 생존자들의 기도회에 참석한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지진을 ‘최후의 심판’의 전조라고 간주하면서 세상의 도덕적 타락을 규탄하던 중이다. 그때 누군가 그들을 알아보고 외친다. ‘저들 때문에 이 재난이 일어났다!’ 광신의 난도질로 연인들이 도륙되면서 이 이야기는 끝난다. 

 

대재난 이후 열린 세상은 이처럼 천국이면서 동시에 지옥이었다. 이 천국과 지옥의 동시 병발 현상을 재난사회학은 각각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와 사회적 갈등(social conflict)으로 구별하여 정의한다. 재난문학은 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양면 대응이다. ‘연대’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창조해야 하며, ‘갈등’에 개입해서 그 근거를 해체해야 한다.

둘 중 첫 번째 층위를 ‘치유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 재난으로 공동체가 맞닥뜨리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모든 종류의 피해를 가능한 한 빨리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신적 피해의 회복이 문학의 몫으로 주어진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언어화하여 그 고통에 형상(figure)을 부여하고, 그것이 공적 영역 속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치유서사로서의 재난문학은 고통을 재현하고 그에 대한 공감을 유도함으로써 피해자와 동맹을 맺는다.

재난문학의 두 번째 층위를 ‘대항서사’라 부를 수 있다.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줄 이야기를 찾는다. 이에 부응해 특정한 방식으로 재난을 바라보게 만드는 ‘재난인식’과 ‘재난서사’가 다수 출현한다. 복수(複數)로 존재하면서 경합하던 서사 중에서 특정한 서사가 지배서사(dominant-narrative)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지배서사가 가짜 인과성(causation)을 채택하여 사회적 갈등을 촉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면? 이때 필요한 것이 대항서사(counter-narrative)다. 대항서사로서의 재난문학은, 재난을 달리 사고하는 방식(대안적 재난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규모의 서사 투쟁에 참여한다.

2024년 현재 시점에서 재난문학을 논의 대상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21세기의 첫 사반세기가 일면 재난의 시대였다고 볼 만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2001년의 ‘9·11 테러’를 시작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東日本大震災)’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대한민국은 2014년에 ‘세월호 참사’(공식 용어는 ‘세월호 침몰 사고’)를 경험해야 했으며, 2019년 말부터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류는 팬데믹 사태(COVID-19 pandemic)를 함께 겪어야 했다. 우리는 21세기의 재난문학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학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는지를 물어보려 한다. 

 

4. 결론을 대신하여: 상처, 유일한 존재론적 공통항

재난문학은 재난에 대한 이중적 대응이다. ‘사회적 연대’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창조하고, ‘사회적 갈등’에 개입해서 그 근거를 해체한다. 우리는 첫 번째 유형을 ‘치유서사’로, 두 번째 유형을 ‘대항서사’로 명명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언어화하여 그 고통에 형상(figure)을 부여하고 그것이 공적 영역 속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서 사회적 연대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치유서사의 역할이다. 재난을 바라보는 특정한 인식/서사가 지배서사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촉발할 때 재난을 달리 사고하는 방식(대안적 재난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서사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대항서사의 역할이다. 이중 본론에서 더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치유서사의 문화ㆍ문명적 기능에 대해서는 아래 두 비평가의 글이 단서가 되어줄 것이다.

한데 ‘상처’는 말을 요청한다. 굶주린 입이 먹을 것을 요청하듯이. 그것은 법의 말, 정치의 말, 의료의 말을 요청한다. 또한 철학의 말, 예술의 말, 문학의 말도. (...) ‘상처’에 응답하는 이 다양한 말을 올바로 분간하며 듣기, 그 다양성 속에서, 그 단독적인 풍부함 속에서, 비록 말없는 상처에 대한 응답으로서는 하도 빈궁해서 그때마다 충격을 받을지라도, 그 빈궁함을 견디며 그 경험을 통해서, 또 하나의 다른 말, 다른 개념, 다른 감응의 발명을 시도하기. 아마 지금까지도 늘 그랬겠지만 오늘 이후에는 더욱 이러한 행위 없이 그 이름에 어울리는 ‘문화’는 있을 수 없으리라. (우카이 사토시)

그런데 뒤집어 말하면 누구라도 무언가 상처나 굴욕감을 가지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이 오늘날 우리의 거의 유일한 존재론적 공통항이다. (...) 셀 수 없는 상처=비밀을 짊어진 현재의 문명에서는 그 상처들에서 출발해 무엇을 건설할 것이냐는 질문이 더욱 중요해진다. 달리 말하면 어디에도 상처 없는 존재는 없고 인간에게도 사회에도 오류나 실패가 상례화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로부터 어떻게 다시 일어설지가 문명론적인 과제로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상처를 미학적으로 관상(觀賞)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천적 철학을 길러 내야만 한다. (후쿠시마 료타)

한 세대 정도의 나이 차를 갖는 두 비평가가 각각 9·11과 3·11 이후에 출간한 저서에 붙여둔 말이다. 동의할 것도 부정할 것도 없이 옳은 말이라 윤리적 언설로서는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평도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상처에 대한 응답, 상처끼리의 연대를 ‘문화’ 혹은 ‘문명’의 층위에서 사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것, 우리 식대로 말하면 ‘치유’가 문화/문명의 건설 원리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문명 층위로의 이런 도약이 가능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치유서사와 대항서사의 기능이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어서다. 생각해보면 9·11의 대항서사가 ‘적과 동지’의 구별을 해체하려 한 것은 주디스 버틀러가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라고 부른 것에 도달함으로써 상처의 연대를 이룩하기 위해서이고, 3·11의 대항서사가 ‘신화와 부흥’의 재난인식을 거부하고 디스토피아적 비관주의의 편에 선 것은 희망의 큰 목소리 속에서 외면된, 재난 지역과 미래 세대의 상처에 응답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가 21세기의 문화/문명의 핵심이라면 21세기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재난문학이고, 바로 그것인 한에서, 문학은 더 오래 존재해도 좋을 것이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21세기 문학의 흐름과 방향 (신형철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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