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의 삶이 지혜로 녹아 있는 지역 고전을 발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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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의 삶이 지혜로 녹아 있는 지역 고전을 발굴하다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2.26 0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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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 소멸 시대에도 ‘지방 문학’은 활기
- 지만지한국문학, 《경봉 시집》 등 10종 추가 발간

■ 『지역 고전학 총서 2차 세트』 – 전10권 | 정석·엄명섭·박상절·정도응·조수도 외 5명 지음 | 지만지한국문학 | 2024년 02월 20일

 

고전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1차적으로 규정을 받으며, 지금 이곳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로 전달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은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고정불변의 권위를 특별히 갖지는 않는다. 보편성을 갖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의 경우, 그것이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여전히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철저하게 ‘지역’에 복무한다. 지역은 지금 이곳의 다른 말로서,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삶 자체를 뜻한다. 또한 ‘지역’을 중심과 상대되는 주변으로 환치해서도 안 된다. 중심도 지역이요, 주변도 지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역’을 인간의 삶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장소,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 의해 구분되는 인간적, 인문적 영역으로 이해한다. 곧 특정한 장소는 상상의 중심에 의해 주변화한 곳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 규정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에서 생산된 텍스트, 특히 한문 고전은 무엇이든 의미가 있다. 모두 특정 주체들의 이성과 감성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문 고전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 전통의 삶이 지혜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지역은 한글이 일상어가 된 근대 이후에도 한문 고전을 생산하고 있었다. 지역의 한문 고전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삶을 보여 주는 텍스트였던 것이다.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한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 문학의 그늘에 가려 사장돼 있던 영남학, 호남학, 기호학 등의 지역 고전학이 지방 대학 교수와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와 발굴 노력으로 빛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1차로 경북 예천 지역의 선비 가암 전익구의 《가암 시집(可庵詩集)》, 울산 최초의 대과 급제자로 18세기 울산을 대표하는 학자 이근오의 《죽오 시선(竹塢詩選)》, 양산 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金剛山觀賞錄)》 등 10권을 소개한 것에 이어, 이번에 2차로 양산 통도사의 선승 경봉 정석의 《경봉 시집(鏡峰詩集)》, 전주의 근대 유학자 엄명섭의 《경와 시선(敬窩詩選)》, 함안의 선비 박상절이 한강 정구, 망우당 곽재우, 간송당 조임도 등의 뱃놀이 기록을 편찬한 《기락편방(沂洛編芳)》 등 총 10권을 펴냈다.

이번 2차 총서는 여말 선초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다양한 시대적 인물들의 작품으로 한시(漢詩)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5언 율시와 7언 절구, 일기와 놀이 기록까지 다양하다. 영호남과 경기·강원에서 활동했던 학자들이 지은 이번 작품들은 지방 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지역 고전학 총서를 기획한 김승룡 부산대 교수는 “누구도 관심 두지 않던 지역 고전을 발굴해 출판하는 일이 매우 힘겨웠다”면서 “출간 이후 해당 문중은 물론 지역 학자들을 중심으로 호응이 커지면서 양과 질이 심화,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역성을 찾아낸 것이 무엇보다 큰 성과”라면서 “지역 고전학을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 이번에 출간된 책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경봉 시집》(정석 지음, 최두헌 옮김, 469쪽) - 경남 양산

양산 통도사의 선승 경봉 정석의 시를 소개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대선사였던 경봉은 한국 시승의 계보를 이으며 경허 이후 불가 한시 영역의 대미를 장식했다. 다양한 소재를 다룬 시들에는 그의 선(禪)적 깨달음의 근원은 물론, 깊은 한문학적 소양이 드러난다. 특히 이 시집은 경봉의 《일지(日誌)》에 수록된 시를 있는 그대로 소개해 미화나 왜곡 없이 작품의 본질을 살필 수 있다.

■ 《경와 시선》(엄명섭 지음, 엄찬영 · 강동석 옮김, 203쪽) - 전북 고창

근대 유학자 경와(敬窩) 엄명섭(嚴命涉)의 시를 소개한다. 그의 문집 《경와사고(敬窩私稿)》에 수록된 800여 수의 시 가운데 127제 157수를 가려 뽑았다. 시에 드러난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될 뿐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와 문화, 유학자로서의 모습 및 가치관 등을 이 책을 통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 《기락편방》(박상절 엮음, 백운용 옮김, 335쪽) - 경남 함안

자연을 만끽하며 그 속에서 심성의 의미를 되새겨 마음을 닦고 여유를 즐겼던 선조들의 모임 둘을 소개한다. 1607년, 영남학파의 거두 한강 정구를 위시한 용화산 아래 낙동강의 모임과 1634년, 현풍 현감 김세렴을 비롯한 젊은 선비들의 풍영대 모임이다. 1757년, 박상절이 선조들의 기록을 모으고, 시와 그림을 더하고 서문을 붙여 하나의 책으로 간행하니 바로 《기락편방(沂洛編芳)》이다.

■ 《무첨재 시선》(정도응 지음, 최금자 옮김, 220쪽) - 경북 상주

17세기 학자 무첨재(無忝齋) 정도응(鄭道應)의 시를 소개한다. 정도응은 유성룡의 고제자인 정경세의 손자로, 명망 높은 가문 출신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은자적 삶을 살면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몰두하고자 했던 그의 탈속적 정신이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우인 목재 홍여하, 가암 전익구 등과 주고받은 시들도 여럿 수록하고 있어 당시 영남학파 학자들의 교우 관계도 함께 살필 수 있다.

■ 《신당일록》(조수도 지음, 정우락 옮김, 320쪽) - 경북 청송

16세기 퇴계학파 학자 조수도의 일기를 소개한다. 그는 1558년 1월 28일부터 1592년 9월 28일까지 약 178일간의 일들을 일기로 남겼다. 진솔한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 사대부의 과거에 대한 생각과 당대의 과거 제도, 여행길의 고달픔, 지역 선비의 일상생활 모습, 도산 서원과 청량산 유람기, 임진왜란의 상황과 의병 모집 기록 등, 한 평범한 청년 학자가 16세기의 조선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 《열상 기행 절구》(신필영 지음, 표가령 옮김, 213쪽) - 경기 양평

1846년, 신필영은 성묘를 위해 서울 두모포에서 남한강을 거쳐 고향인 경기도 지평을 다녀오면서 7언 절구 100수의 연작 기행시를 썼다. 기본적인 기행시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한강 일대의 역사·문화 경관, 빼어난 산수풍경, 친교를 맺은 인물들과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정회(情懷), 향촌의 일상 등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조선 후기 죽지사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 《예암 시선》(하우현 지음, 김승룡 · 김남희 · 이단 옮김, 205쪽) - 경남 진주

18세기의 진주 학자 예암(豫菴) 하우현(河友賢)의 시 77제 128수를 소개한다. 남명학을 계승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학업 성취를 보였는데, 어느 날 문득 크게 깨달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몰두해 치지(致知)를 학문의 요체로 삼고 이를 위해 항상 마음속에 경(敬)을 간직하고자 했다. 그의 시를 통해 당시 지역 고전 지식인이 갖고 있던 학업의 의미와 고뇌, 젊은 지식인의 삶의 방향을 반추할 수 있다.

■ 《용만분문록》(양황 지음, 이영숙 옮김, 197쪽) - 경남 함양

임진왜란 당시 18세였던 함양의 선비 진우재(眞愚齋) 양황(梁榥)이 부친 양홍주와 함께 사재를 털어 화살대 4만 개, 화살 300부를 만들어 의주로 몽진한 선조를 찾아가 진상하고, 이를 통해 평양성 전투의 승리를 견인한 뒤 다시 한양으로 환궁하는 왕을 호종한 기록이다. 당시 전황의 급박함과 민중의 고초, 젊은 선비의 우국충정의 심정이 일기와 그 일기에 수록된 한시들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 《이재 시선 2》(황윤석 지음, 이상봉 옮김, 336쪽) - 전북 고창

18세기 호남 선비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 가운데 중요한 시들을 가려 묶었다. 약 1630제의 시 가운데 ≪이재 시선 2≫에는 황윤석의 19세부터 29세까지의 시 100제를 수록했다. 학문과 과거 시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부터 공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마음가짐, 학문과 입신양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점차 성장해 가는 젊은 선비 황윤석을 만날 수 있다.

■ 《태재 시선》(유방선 지음, 김승룡 · 류재민 옮김, 255쪽) - 강원 원주

여말 선초의 학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5언 율시 125제 153수를 소개한다. 그는 가화(家禍)로 인해 기나긴 유배 생활을 했으나 고려 말 시학의 전통을 계승해 조선 초 문단을 진작하고, 한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서거정, 권남, 한명회 같은 탁월한 제자들을 길렀다. 그의 5언 율시에는 당시 문인들과의 교류, 유배지에서의 아픔, 그 가운데서도 잃지 않았던 ‘한(閒)’의 정서가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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